길을 걷는데 한 학생이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몰라, 이력서 100개는 쓴 것 같아….”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다니는 친척 동생들은 이대로는 힘들다며 유학 준비와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스물여섯살인 옆자리 후배는 대학 동기들이 취업이 안되는 통에 채플 과목만 수강하는 식으로 가능한 한 졸업 시기를 늦추고 있다고 한다. 호객꾼들이 모두 일본말로 소리치는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는, 일본 남자의 가이드부터 밤일까지 패키지로 하는 여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경기 불황과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일반명사화되어가는 이런 시점에 읽는 <퍼킹 베를린>은 국경을 넘어 오싹함을 안긴다.
<퍼킹 베를린>은 저자 소니아 로시의 자전적 이야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으로 진학한 뒤 가난한 고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인터넷 채팅, 안마시술소를 비롯한 성매매업소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를 쓴 책이다. 베를린에서 처음 구한 아르바이트 급료로는 생존은 가능하지만 생활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엔 몸을 보여주는 정도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쇼핑을 했다. 어학 코스를 마치고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어린 시절 이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 성공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벌어 쉽게 쓰는 데 익숙해지고, 결국 점점 노출이나 서비스의 강도가 센 업소들로 옮겨간다. 그녀는 그렇게 섹스워커(sex worker)가 된다. 성도착 행위를 원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기도 하고, 같은 일을 하는 여자들과 경쟁심을 느끼며 우위를 점한 데 기뻐하기도 한다. 사창가를 벗어나는 사람은 1천명 중 한명꼴. 그녀는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라고들 하는 그들을, 유럽에서는 1천유로 세대라고 부른다. 25~35살 사이의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말이다. 이전 세대보다 교육을 더 받았고, 더 많은 능력치(이른바 스펙이라고들 하는)를 보유한 한창때의 젊은이들이지만, 무엇보다 보는 눈만큼은 타고난 경제적 계급을 뛰어넘은 최고급이지만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다. <퍼킹 베를린>은 그런 세대의 고민을 섹스워커라는 극단적인 체험을 통해 풀어낸다. 젊은 여인의 허영심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섹스산업을 둘러싼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책. 책 말미에는 독일의 성매매법과 섹스워커라는 직업에 대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