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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트라이앵글
고경태 2009-04-03

어쩌면 맥락없는 세 종류의 이야기다. 1. 한 여자 연예인이 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조금씩 뜨던 여배우였다. 그녀는 죽기 전 기록을 남겼다. 지긋지긋하게 싫었으나 억지로 나가야 했던 술시중. 그 술시중을 해준 인물들의 명단을 종이에 적어놓았다. 술시중은 로비의 수단이었다. 기획사 대표는 업계에서 영향력을 지닌 인사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그녀를 포함한 신인 연예인을 이용했다. 그녀는 끝내 죽음으로 반응했다. 그녀가 따라준 술을 마셨던, 그러니까 로비와 접대를 받았던 이들은 지금 벌벌 떤다.

2. 그의 로비는 거침없었다. 워낙 통이 컸던 터라 ‘광폭’이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을 지경이었다. 그는 정·관계의 실력자들에게 돈과 선물을 마구 뿌렸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1억원어치 백화점 상품권을 건네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나서는 지역 인사에게 8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주었다는 혐의는 손톱만큼 작은 빙산의 일부란다. 그는 구속될 때 “내가 다 끌어안겠다”고 했지만, 검찰이 자신의 기업과 가족을 압박하자 적극적으로 돈받은 이들을 공개했다.

3. 진실은 무엇인가. 카메라를 들고 악착같이 미국에 가서 그 진실의 조각을 맞추었던 이들은 1년 만에 일망타진될(!) 지경이다. 2009년 3월26일 현재, 한명이 검찰 수사관들에게 전격 체포됐다. 나머지 이들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굴복할 것이냐, 맞설 것이냐. 그들의 동지들이 속한 집단이 술렁거린다.

위의 셋은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흔히 하나의 영화에 적절하게 배치될 만한 어떤 배역의 전형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죽음을 통해 거대한 비밀의 벽에 구멍을 낸 비련의 여인. 장자연. 연신 호방한 보스처럼 군림하다가 영화 종반 퇴로가 막히면서 비굴해지는 악당, 박연차. 권력을 쥔 자들에게 두드려맞고 깨지면서도 해피엔딩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쟁취할 것만 같은 착한 주인공의 포스, MBC <PD수첩>팀.

물론 그들의 이야기는 제각기 따로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다. 모두 파괴적이고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것만 같다. 장자연과 박연차를 둘러싼 상황은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가깝다. 누가누가 한 연예인의 슬픔에 돌맹이 하나씩을 더 얹었나…몇몇 문제적 인물들은 진짜 돈을 받은 것일까. 사실을 밝히려는 힘과 덮으려는 힘간의 게임은 더욱 치열해지리라. 반면 광우병 보도를 문제삼은 검찰의 <PD수첩>팀 수사는 액션물이 될 공산이 크다. 투쟁은 액션이니까.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장자연 리스트도 아니고 박연차 리스트도 아닌 나의 리스트는, 산이다. 봄인데 마감만 하다보니 심란하다. 친구들과 산이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