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도 혼자서는 무서워서 볼 수 없었던 내가, 무덤 옆의 외딴집에 살면서, 쪽방의 손바닥만한 아크릴 창으로 빛이 새어들기가 무섭게 낫을 치켜들고 마른 수풀을 가르며 숲속에서 사그락거리게 되었다. 귀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을 무어라 부르건, 인간의 형상이 아닌 채로 또는 형상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영들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 나를 해코지하도록 힘을 자진해서 빌려주기 전에는, 그들에게는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통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한 세포로 너나없이 평등한 인간들 사이에 위계가 발생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방식으로건, 나의 힘, 나의 에너지를 자진해서 양도하는 탓이다. 이 대목이 이해가 안 가면, 제임스 레드필드의 소설들을 읽어보실 것. 구르지예프와는 달리 여러분들의 형편없는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제발 인정하시라. 가방끈이나 토익점수, 아이큐 들먹이지 마시고, 이유도 모르고 외워둔 쪼가리 지식이나 단어 남발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형편없다는 것을. 진짜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조또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가이 리치 감독의 <리볼버>는, 감독의 안테나에 우주의 메시지가 번개처럼 꽂혀서 탄생한 또 하나의 영화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명대사가 미친년 머릿속 이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이 걸작영화의 엔딩 언저리. 마치 스미스 요원과 네오의 마지막 한판처럼 마주 선 레이 리오타와 제이슨 스타뎀. 이때, 레이 리오타가, 불판 위의 삼겹살같이 기름땀을 질질 흘리면서, 결정적인 독백판 명대사를 날린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 두려워 하라구. 제발 두려워하란 말이야!” 두려움을 먹고 연명하는 괴물들에게, 두려움을 헌납하지 말 일이다.
두려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다큐멘터리 1편의 엔딩 내레이션이 바로 “두려움이냐, 사랑이냐”다. 9·11이 조작극이라는 것을 비롯해서 음모이론으로 점철된, 마이클 무어의 편집기술을 연상케 하는 이 다큐가 사랑스러운 것은, 바로 이 대사 때문이다. 돈 워리. 돈 비 어프레이드. Know Thyself!
Know Thyself. 기억하시는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처음 오라클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 걸려 있던 액자 속의 문구. 초딩처럼 번역하자면 “네 주제를 알라”가 되겠지만, 충분히 성숙한 영혼이라면, 너 자신이 네오라는 것을 알아차리라구 제발, 이라는 정답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면, 두려움 따위는 사라진다. 앞서의 장면에서, 네오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매트릭스에서 일개 해커에 불과했던 자신을, 모피어스나 트리니티 같은 뭔가 있어 보이는 인간들이 ‘The One’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지 않은가. 구세주. ‘The One.’ 자신이 진짜 ‘The One’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네오는 오라클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질문. “내가 The One이 아니죠?” 이미 그 답은 액자 속에 있었다. 자기 자신을 알기만 한다면, 자기가 The One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멍청한 영웅 네오는, 권위있는 누군가의 확인을 받고 싶어한다. 이때, 우리의 현명한 오라클은 그에게 쿠키를 권하면서 “안됐구나, 얘야”라는 답을 돌려주는데, 이것은 자기가 그라는 것을 알지 못하다니 안타깝다는 뜻이건만, 네오는 “역시 나는 아니구나”라고 받아들인다.
물론 오늘도 신의 음료,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쓰고 오줌 누러 나갔다. 하늘을 보면서 오줌 눌 수 있다는 사실에 오늘도 감사하면서, 하늘을 보았다. 여러분도 보셔야 한다. 오늘 내가 본 그 하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