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사람 중에 WBC가 끝난 걸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두명이다. 한명은 우리 사무실의 이 팀장.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요즘 임창용, 김병현 선수의 심리 특징과 표출 양상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그나저나 임 선수, 왜 청와대 만찬에는 안 간 거예요? 사인을 못 받은 거? 아니면 정면승부?). 다른 한명은 대통령님. 본인 말마따나 “우리 서민들이 이 야구 하는 동안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다 잊어버렸을 거”라지 않나. 그 서민들이 이제 다시 팍팍한 현실로 돌아왔으니, 귀가 많이 가렵겠지. 참, 한국말 잘 못 알아들으시지.
모두들 엄청난 ‘인플레’에 시달리는 요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디플레’ 정신은 귀감이 될 만하다. 검찰 수사 중에 한화, 원화 구분없이 5천만원은 5천원, 1만달러는 1만원이라고 명명해 수사 관계자들을 헷갈리게 했다고 한다. 특유의 어법 때문에 수사팀은 조서 작성 뒤에도 불법적으로 건넨 로비 자금의 액수를 정확히 맞춰보는 ‘수고’를 해야 했다는데. 이 소식을 들은 내 남친 이아무개는 “폭탄주 마실 때 소폭에다 만원짜리랑 천원짜리랑 같이 감으면 천만원주, 그 밑에 라이타 불 켜면 천만불주라고 하는데, 이 아저씨를 보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술 먹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신·구 정권 안 가리고 전방위로 확산되는 ‘박연차 리스트’ 수사의 최종 과녁이 노 전 대통령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스케일을 참고할 때 앞으로 정·관계 인사들은 박 회장의 문어발에 닿은 사람과 안 닿은 사람으로 나눠야 할 것 같다.
앞으로 기자, PD, 작가들도 검·경 조사를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으로 나눠질지 모르겠다. 파업을 예정해놓고 있는 노조위원장을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덜컥 구속수감한 공권력의 막가는 행보에 안 걸리는 언론인이라면… 할 일을 안 했거나 엄청 운 좋은 이들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 비장한 80년대식 용어가 정말 싫은데,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이 구속되는 걸 보니 ‘언론압살’이라는 표현밖에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민생파탄 민주압살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던 20년 전 구호가 막 귓가에 떠오른다. 아무리 봐도 이 모든 상황은 ‘인플레 시대’를 타개하기 위한 공권력의 도저한 ‘디플레 전략’이다. 시대를 뒤로 돌리거나 아예 연도를 축소시켜버리는.
그나저나 우리 박 회장님, 뉴욕 맨해튼 한 식당 종업원에게는 팁을 얼마나 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