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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브뤼겔을 향한 강한 오마주

<플랑드르의 속담> 그림을 상당 부분 모방하지만 결코 모방은 아닌 <킬러들의 도시>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피터 브뤼겔의 <게으름뱅이의 천국>, 혹은 <장님들의 추락>을 떠올린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를 보면서도 그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플롯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무척이나 골몰했고, 그 영화의 몇 장면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움직임을 멈추고 그림이 되어주기도 했다. 실상 영화와 회화의 관계는 운동(action)으로 인한 심상의 달아남을 제외하면 꽤나 닮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감각을 통해 전이되는 체념, 혹은 동화를 경험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얻어지는 은유(metaphor)의 결과물은 판에 박힌 것, 즉 클리셰로 정리되겠지만 들뢰즈의 말마따나 인간의 지각이란 결코 전체를 한번에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이 체계화된 지각의 결과물을 마냥 평범함으로 치부할 순 없다. 오히려 이 영화 <킬러들의 도시>가 그렇듯 판에 박힌 은유를 변조하는 진부함의 힘이 어느 순간 역설적 창조력으로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빡빡한 대사에 블랙유머의 적절한 조합

언젠가 브뤼셀의 한 미술관에서 <이카루스의 추락>을 감상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초등학생 무리가 내 등 뒤를 감싼 적이 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 그들을 통솔하는 선생님은 그림 속에서 무엇이 보이는 지를 물었고, 아이들은 ‘배와 산, 사람’ 등의 요소를 찾아냈다. 이야기는 약 5분간 지속됐는데 ‘이 그림이 땅과 바다, 바람의 세 가지 요소를 그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뒤 그들은 사라졌다. 순간 혼자 남은 나는 길을 잃는다. 분명 오른쪽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들이 이미 방을 나가버린 거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목이 아니라 인상이었고, 다만 내 인지의 시작점과 그들의 것은 달랐을 뿐이다. 어떤 사물, 혹은 예술작품에 대한 표출 방식을 비견할 때 확실히 동양적 상식과 어긋나는 부분이 서양인들에겐 존재하는데, 특히 분리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좀더 직설적이고 더 명료한 부분이 있다. <킬러들의 도시> 역시 이러한 의식의 일부를 반영하는데, 이 영화의 구조는 내면의 우아함보다 외양의 명료함에 집중되어 있다.

솔직히 이렇게 직설적 클리셰가 많은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어떤 기자는 내게 ‘귀엽고 재미있다’는 표현으로 이 영화를 소개했는데, 구도적 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을 것 같다. <킬러들의 도시>가 귀여운 이유는 이른바 스크루볼코미디 분량의 빡빡한 대사에 아이러닉한 블랙유머를 아주 잘 조합해내기 때문인데, 적재적소에서 세부 플롯이 구르고 전진하는 덕에 설혹 이 지면을 장르의 문제로 채운다 하더라도 꽤 재밌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히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에 이르러 내 생각은 방향을 트는데, 사실 미술관 시퀀스 이후 전개되는 후반부의 양상은 확실히 무언가 전제된 결말을 향해 내달린다는 인상이 강하다. 어쩌면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이미 종탑의 추락 에피소드 즈음 브뤼겔의 그림을 떠올렸겠지만,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도시에서 중세의 의상을 입은 인물들과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두명의 킬러, 안개가 걷히고 이들의 모습이 명백히 드러날 즈음 영화의 외형은 완벽히 브뤼겔의 그림을 모방하고 있었다. 어쩌면 브뤼겔의 <플랑드르 속담>을 상기한 채 이 영화를 본다면 예측된 결론을 향해 가는 영화의 전개에 하품을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왜 킬러는 어린이를 죽이지 않는가

벨기에의 브리주는 플랑드르 화파의 거점도시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인용되는 <최후의 심판>은 15세기 수도원에 대한 적대감과 부조리에의 도착을 떠올리게 하기에 영화적 내용과 상통한다. 하지만 좀더 내밀하게 영화를 들여다보면 보스 그림의 영향이 고스란히 16세기 브뤼겔의 그림에로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이 부분에서 세잔을 좋아하면서도 쿠르베를 인용한 홍상수가 떠올랐다).

화법마저 비슷한 이 둘의 그림 중 영화에서 인용된 쪽은 실상 보스보다는 브뤼겔에 가깝다. <플랑드르 속담>의 많은 부분이- 브뤼셀 미술관의 초등학생들이 그림을 인지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에서- 물리적으로 <킬러들의 도시> 속 상당수 장면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게다가 브뤼겔의 회화를 평할 때 미술학자들이 사용하는 ‘블랙코미디’란 용어도 이 영화에 무척 잘 어울리는데, 이런 요소들이 전제가 되어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미지의 내용에 대한 해결 또한 이룰 수 있게 된다. 왜 레이가 대주교를 죽여야 했는지의 설명, 혹은 킬러가 어린아이를 죽이지 않는 것이 왜 불문율인지, 또한 난쟁이의 등장이 단순히 어린아이와의 시각적 동일화를 위해서였는지의 의문이 풀릴 것이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브뤼겔은 구도파의 일족인 쿠른헤르트(Dirck Coornhert)의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 칼뱅교 등 당대 유행하던 종파의 외적인 의식들을 무시하는 성향을 띠었다고 한다. 신을 믿는 것과 외적 의식은 무관하다는 일종의 원칙론인 셈인데, 이런 관점에서 영국 대주교의 자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이 점은 맥도나 감독에게서 대주교의 캐릭터로 활용되는데, 그렇기에 <플랑드르 속담>의 가운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게 수염을 붙이는 남자’가 대주교 캐릭터의 분신으로 영화에서 언급된다. 그림의 남자는 플랑드르의 속담에 따라 ‘위선자’로 지칭되는데, 이런 이유로 대주교는 영화 시작 전 죽임을 당한다. 난쟁이의 비밀도 그림 <어린이들의 장난>을 통해 해소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이 난쟁이를 무시하며 그들이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 폄하하는 것은 생각없이 지껄이는 레이의 습성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림 속 어린이들이 인생을 허비하는 인물로 해석되기에 복잡다단하다. 미술학자 로즈-마리에 따르면 그림 속 250명의 아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갖가지 놀이를 재연하긴 하지만, 이들의 얼굴이 나이를 알 수 없게 표현되었기에 <아이들의 장난>은 단순한 풍속화보다는 풍자화에 가깝다. 즉 브뤼겔은 이 작품을 인생을 허비하는 것에 대한 경고, 본질적으로 어른들을 위한 우화로 완성시킨다. 게다가 이런 인생을 허비하는 놀이는 결국 영화 속 레이의 대사처럼 난쟁이 스스로도 자신을 질책하도록 만들 것인데, 이는 어린아이를 죽여선 안된다는 영화의 대전제와 근접하기에 흥미롭다. 이 논리에 따르면 아이들은 순결무구한 존재, 즉 사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부조리를 생산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 킬러의 전제조건에 합치된다.

인간의 결점인 탐욕과 욕망을 비판한 브뤼겔의 회화가 겉보기에 경쾌한 데 비해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이러니한 것처럼, 영화 <킬러들의 도시>는 전반부보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부조리해지는 극이다. 초기에 등장하는 뉴욕 양키스의 모자를 쓴 뚱보는 또 다른 브뤼겔의 그림 <앉은뱅이들>에서 차용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 둘은 결코 성곽에 오르지 못할 거란 공통점 외에도 미국에 대한 냉소적 시선으로 한데 묶여있다. 이외에도 영화 속 대부분이 그림 <플랑드르 속담>을 따른다. ‘푸른 지붕 아래 악마가 고해성사를 듣고 있는 부분’은 대주교의 죽음을, 부정한 아내를 뜻하는 ‘푸른 망토를 씌우며 남자를 속이는 여자’의 부분은 클로이의 정부를, 그리고 그림의 왼쪽 아래 ‘부지깽이와 물통을 동시에 든 여인’이 비유한 ‘신용없는 자’는 다시금 클로이를 지칭한다. 캐릭터가 미리 정해진 틀 안에 짜맞추어졌단 인상이 드는 것은 이러한 부분이 합쳐진 결과다. 종탑 부근에 그려진 인물들 역시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재활용되는데 ‘황새를 보는 여인’은 ‘우두커니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비유되어 관광하는 켄을 떠오르게 하고, ‘탑에서 엉덩이를 내민 두명의 친구’와 ‘다른 거지가 성문을 잡자 화를 내는 탑 입구의 어느 거지’는 해리와 켄을 동시에, 그리고 ‘단번에 파리 두 마리를 잡으려고 파리채를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은 켄과 해리의 설전을 상기시킨다. 결정적으로 ‘흐르는 물 아래로 은화를 던지는 남자’의 부분은 죽기 직전 켄의 모습과 완벽히 겹쳐진다.

범죄영화에 가장 적합한 아이러니

소설 <곤두박질>에서 마이클 프레인은 브뤼겔에 대한 직접적 차용을 선보였다. 이에 반해 <킬러들의 도시>는 베케트적 인용에 훨씬 가까운 방식으로 브뤼겔을 찬양하는데, 클로이의 대사처럼 이는 브뤼겔과 플랑드르 회화에 대한 ‘강한 오마주’인 셈이다. 여기에 <이카루스의 추락>이 해리의 자살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인다. 오만하게 자신의 믿음을 따르다가 스스로 추락하는 이카루스에 대한 브뤼겔식의 해석, 이는 실상 너무나 영화 속 해리와 닮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모방작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은 이를 인지한 감독이 클로이의 입을 빌려 “모방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모방은 아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촬영 중인 네덜란드영화가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를 모방하지만 결코 모방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영화 <킬러들의 도시>의 최대강점은 블랙코미디의 아이러니를 잘 활용한 데 있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가 하고자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마틴 맥도나는 사회 풍자와 비판적 주제를 웃음을 통해 승화시키는데, 이렇게 사회적 모순을 꼬집어 사회 부조리를 과장되게 그리는 수사법이야말로 범죄를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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