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시대극이 개봉할 때마다 평론가들이 내면적 갈등 때문에 발작 상태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문화적인 당황스러움은 비밀스러운 문화적 자부심에 부딪히고, 비평적으로 진보적이어야 할 필요는 영국 관객이 시대극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엄연한 사실에 부딪힌다.
올 3월 초 <영 빅토리아>가 영국에서 개봉하면서 이같은 현상이 재연되고 있다. 영화는 영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시기를 다룬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3년간 왕위에 머무르며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제왕, 대영제국과 영국성과 도덕적 보수주의로 집약되는 한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내준 빅토리아 여왕의 젊은 시절. 초상화는 대개 빅토리아 여왕을 웃음기 없는 미망인으로 그린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그녀는 독일 귀족 알버트 왕자와 열정적인 연애를 했고 1861년 그가 장티푸스로 때이른 죽음을 맞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겼다. 빅토리아는 영국성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그녀는 거의 독일인에 가까웠다. 그녀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였다. 모두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이다.
빅토리아를 연기한 스물여섯살의 런던 출신 배우 에밀리 블런트는 많은 TV드라마뿐만 아니라 이미 저예산 레즈비언 드라마 <마이 서머 오브 러브>(2004)와 할리우드 코미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까칠한 비서 역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젊은 알버트 왕자 역시 떠오르는 스타이자 키라 나이틀리의 실제 남자친구로 잘 알려진 루퍼트 프렌드가 연기했다.
10대 후반인 빅토리아와 20대 초반인 알버트의 불타는 사랑과 결혼을 자세히 묘사하는 이 영화에서 두 배우 모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역사적 재해석이 다소 있지만 대체로 시대에 충실하면서, 또한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감정을 다룬다. 빅토리아가 참을성있게 기다려준 왕자에게 그녀의 사랑을 선언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영 빅토리아>는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는 거부당했지만 영화제 마켓에서 상영되어 큰 성공을 거뒀다. 영국에서의 리뷰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고스포드 파크>를 썼던 시나리오작가 줄리언 펠로즈와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크레이지>의 감독 장 마크 발리, 뛰어난 조연들과 최고의 세트를 포함해 이 영화에는 영국 평론가들이라도 흠잡을 데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몇몇 리뷰들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그처럼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유명한 장르임에도 영국 시대극이 나올 때마다 영국영화가 너무 진부한 것 아니냐 하는 불편한 감정이 드러난다. 이런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미국영화는 웨스턴영화가 나오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중국영화는 무술영화를 잘 만드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영화를 그만 만들 수 있을까? 홍콩인들은 범죄영화를 그만 만들 수 있을까?
모든 문화는 자신만의 강점과 장르를 갖고 있다. 영국에서만 유독 그 문화적 강점을 약점으로 보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제국의 유산이 아닐는지. 아니면 일반 대중이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 비판의 대상으로 놓고 보는 지적 우월주의의 소산이든지.
그렇다고 해서 영국영화가 시대극을 잘 만든다는 사실만은 바뀔 수 없다. 문화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시대극은 문화적 확실성의 시대를 재현한다. 그리고 배우들이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르는 없다. 그러니 에밀리 블런트에 주목하고 <영 빅토리아>를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