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투리만 귀여운 게 아니다. 광주 MBC <말바우아짐>을 듣다보면 전라도 사투리의 참맛을 알게 될 거다. 정확히 곡성 사투리라는 이 말씨는 애교스럽고 신랄하면서도 박력있다. 서울깍쟁이들에겐 낯설겠지만 빛고을에선 명성이 높은 <말바우아짐>은 말바우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아줌마가 세상 돌아가는 꼴에 일침을 가하는 형식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서민이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든 사회문제들을 끄집어내 우리네 속을 시원하게 해장한다. 말바우아짐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푹 빠진 팬들이 많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진행자인 지정남의 공이 크다.
지정남은 광주 지역의 스타다. ‘놀이패 신명’의 단원으로 마당극 배우인 그는 광주 MBC <신얼씨구학당>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최근 그의 이력에 색다른 항목이 하나 추가됐으니 연기자 타이틀이다. 여성주의 사이트 ‘줌마네 대표’로 유명한 이숙경의 장편 데뷔작 <어떤 개인 날>에 캐스팅된 그는 강의를 하러 남한강의 어느 연수원을 찾은 서울 여자 보영과 우연히 한방을 쓰게 된 민요강사 정남 역을 맡았다. 어째 캐릭터와 이름이 같다고? 사실 정남은, 그의 사투리와 넓은 품과 넘치는 사연을 고스란히 그러모은 캐릭터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이혼녀라는 설정도, 무너지듯 흐느끼는 마지막 울음도 현실이요, 자연스레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밤새도록 맥주를 기울인 밤. 그럼에도 누가 볼세라 바삐 구겨넣은 상대의 상처를 다 끄집어내지 못한 밤. 정남은 보영을 대신해 어깨를 들썩이면서 눈물을 쏟는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는다.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을 때, 대신 울어줄 사람이 가끔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3월11일 인터뷰를 위해 전라도에서 먼 걸음을 한 지정남을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어려운 이야기도 솔직하게 쏟아내는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까맣고 촉촉해 보였다.
-오디션의 마지막 응시자였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오디션에 응하게 됐나요. =이숙경 감독님이 광주 지역에서 전라도 사투리 쓰는 분 찾는다고. 극단으로도 의뢰가 들어오고. 제가 알고 있던 학교 교수님한테도 연락이 왔어요. 한번 응시해보라고. 처음 들어갔을 때 숙경 언니 말에 의하면 너무 예뻐서 저는 안되겠다고. (웃음) 하여튼 2주 뒤에야 연락주신다고 그러더니 좀 빨리 연락이 왔어요. 같이 해보자고.
-혹시 이숙경 감독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던가요. =아픈 상처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거를 상황에 젖어서 죽겠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남 이야기 하듯이 했는데 이미 상처가 좀 아문 단계에서 나오는 말투나 그런 부분이 맞았던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이혼 5년차여서. 제 말투 자체가 마당극을 하다 보니 말할 때 음률이 조금 있거든요. 말을 노래같이 하는 사람을 찾았대요. 또 광주에서 국악프로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신얼씨구학당>이요? =어메. 아시네 시방.
-그럼 원래부터 영화 출연에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니었겠네요. =아뇨. 전혀.
-오디션에 붙었어도 저어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출연을 마음먹은 이유는 뭔가요. =그죠. 광주 지역에서는 방송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가 이혼했는지 주변 분들만 알지 공개가 안됐었거든요. 어른들 상대하는 프로그램이라 좀 꺼려하긴 했는데 제가 맨 처음 이혼을 했을 때 토해낼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어찌됐건 내가 선택한 부분에서 책임을 지고 싶은데 그게 어려울 거 아니에요. 사회에서 바라는 정답으로 살면, 편안함이 있잖아요. 오답이라는 걸 선택했을 때 두려운데, 그 두려움을 소통하고 싶은 사람을 못 찾았어요. 그래서 아, 나뿐만이 아니라 대개 다 그럴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좀. =지금은 괜찮죠. 한번 까버렸는데. (웃음) 엄마에게도 이혼하고 나서 1년 뒤에나 말했어요. 몰랐어요, 엄마는.
-영화는 언제 처음 보셨나요. =독일 가서 처음 봤죠.
-어떠셨어요. =몰아넣고 놀아봐라, 감독님은 이런 식이잖아요. 수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키워드를 막 줘요. 죽음, 아이들, 육아, 이런 걸 막 이야기하는데 그게 어떻게 편집이 됐을까 진짜 궁금했거든요. 나는 내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식으로 보일까. 근데 보니까 괜찮던데요. (웃음)
-섹스 이야기도 길게 나오는데 ‘혼자 해결하는 친절한 금XX씨’ 부분은 너무 웃겼어요. =딴지일보, 제가 자주 들어가거든요. 딴지몰 가면 있어요. 제가 시사프로를 진행하다 보니 주로 프레시안이나 대자보, 그런 데 많이 들어가서 봐요. 연합뉴스나 YTN도 그렇고. 심심해서 한번 들어가봤더니 그런 게 있더라고요. 이름 정한 사람의 상상력 때문에 들어가는 거예요. 진짜 그게 필요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웃음) 요새 신제품이 뭔지 알아요?
-뭔가요. =‘F4 X미남’. (좌중 폭소) 그거 보면서 뒤집어지는 줄 알았잖아.
-어머니 이야기는 어떤가요. =대부분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사세요. 저희 엄마는 마흔에 혼자 되셨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애들이 다섯이에요, 다섯. 논은 세 마지기고.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거죠. 그랑께 일만 하신 거야. 우리 엄마는 자다갖고 잠꼬대로 물대라, 비온다 그러세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도 그렇지 않나. 저야 인제 방송 일도 하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이렇게 자기 계발도 할 수 있는데 특히나 정규직도 없어지는 상황이니 비정규직 엄마들은 설거지 갔다 오면 다음날 일자리 없어져불고. 그러면 잠꼬대를 그렇게 하죠. 애기들 키워야 하는데.
-배우들 입장에서도 마법 같은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저는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이래가지고 대본 같을 걸 써요. 아따 인자 이혼으로 써볼까 그랬는데 안 써지는 거예요. 내 문제라. 내 인생에 이혼이 무엇이었는지 정리를 하고 싶었는디 영화에서 그 밤을 지나면서 내 감정이라든지 가지런하게 정리가 됐죠.
-이숙경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는지 궁금한데요. =나는 그 양반을 테레비에서 많이 봤잖아요. 나는 구면인데 그 양반은 초면이고. 나는 서울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어요.
-영화에서 말하듯이 ‘서울 다마내기’들이요? =네. 전라도 사람들은 다마내기들이라고 해요. 까도까도 뭣은 안 나오고 눈만 맵지. 알맹이는 없어. 조금 그런 게 있었어요. 근디 아줌마들끼리 통하는 게 있더만. 저는 그전에는 지식 콤플렉스가 살짝 있었어요. 그란디 그걸 찍고 나서 그런 게 깨지고 몸으로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숙경 언니도 그걸 충분히 인정해주시고. 그래가지고 줌마네 캠프까지 갔어요.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잖아요. 노동운동부터 시작했는데 되게 딱딱해요. 줌마네 가니까 완전히 자연스럽더라고요. 이렇게 아줌마들이랑 같이 뭘 해보는 건 정말 보람된 일인 것 같다. <말바우아짐> 작가 언니랑 뜻이 좀 맞는데 그 언니한테 광주에 그런 거 하나 만들어보자. 아줌마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잖아요.
-영화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돼 베를린에 다녀오셨는데 어떠셨어요. =머리털 나고 그렇게 혼자 어딜 간 건 처음이었죠. 무등양말에서 해고됐을 때 노동분쟁위원회 이런 데서 재판받잖아요. 그때 혼자 서울에 오고. 놀러 몇번 오고. 일을 하러 혼자 서울에 올라온 건 처음이었어요. 근데 혼자 베를린에 비행기를 14시간 타고 간 거야. 그 자체가 놀라운 거지. 이 영화가 혼자 뭘 하게 많이 해줬어요. 가가지고 오메, 공항에 떨어진께 진짜 아줌마들 다 똑같더만. 표정이나 행동이나 똑같고. Q&A 할 때 독일 아줌마가 자기도 공감한다 할 땐 정말 놀랐어요. 인정을 받았다기보다는 인간이 살면서 감정흐름은 다 비슷한가 보구나. 그래, 열심히 살자 그런 자신감을 얻었죠.
-‘시대가 원하는 무당이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긍께 제가 하고 있는 마당극이 마당굿이에요, 굿. 집회 때 마당극 많이 하잖아요. 얽힌 걸 풀고 거기서 살아갈 힘을 다시 얻어가라고 굿을 하는 거예요. 무당 하시는 분들은 신병을 얻잖아요. 저희도 그런 것 같아요. 역사공부나 좀 다르게 보려고 하는 눈이 있으면 누구나 다 그런 신병을 갖고 있고. <한겨레>도 어쩌면 그렇고. 오프라 윈프리도 어쩌면 그렇고. 숙경 언니도 큰 무당이고. 뭔가 얽혀 있는 걸 계속 풀어야 하지, 사람이 안 그럼 죽잖아요. 또 방송도 시골에 가서 하거든요. 사라져가는 공동체, 이 안에 숨어 있는 굿들이 또 있어요.
-놀이패 신명에 몸담고 계신데요. 한때 토큰 몇장을 월급으로 받은 적도 있다고요. =퇴근할 때 선배가 토큰 두장을 딱 줘요. 요거는 집에 갈 때 쓰고. 요건 내일 아침에 또 올란지 말란지 결정해라. 언제든 저는 추호도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래갖고 10만원 받고 20만원 받고 40만원 받고 60만원 받고 이렇게 쭉. 실은 관객이 주는 에너지가 엄청 나요. 우리가 극장에서 공연한 지 얼마 안됐어요. 시골 장판, 울퉁불퉁하고 비 온 다음날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데 거기서 <농민극>을 해요. 할배들이 띠 두르고 쌀 수매도 안 해줌서 수입쌀 들여온다고 쌈하는데. 그때 제가 쌀 역할을 했어요. 칼로스쌀하고 싸우다가 구덩이에 팍 엎어져 있는데 겨울에 물이 옷에 싹 스며들어요. 그걸 보고 아침부터 약주를 좀 드신 할아버지가 눈물을 뚝뚝뚝뚝 흘리면서 니가 누워 있으면 안되지, 쓰러지면 안되지, 인나야! 그러면서 억지로 일으키려고 하는 거예요. 쌀아! 이럼서. 누워 있는 나도 울고 아버지도 울고 보는 사람도 울고. 그 다음 무당이 나와서 씻겨줘고. 그럼 이제 슬슬슬슬 일어나서 춤을 추고 다시 박수를 받고 이런 거였는데 아버지가 그러니까 굿은 끝나분 거야, 그렇게. 결국에 아버지랑 같이 춤추고. 그런 데서 오는 감동이나 진동은요, 뭐 엄청나죠. 지금은 학교하고 방송일 같이 해야 해서 객원으로만, 상근은 못하고. 마당극은 잘 선택한 것 같아요.
-‘말바우아짐’이라는 게 말바우시장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이런 뜻이죠? =아짐은 아줌마의 정겨운 표현이죠. 노점상이에요. 맨 처음 방송됐을 때는 이게 진짜 말바우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다. 막 내기를 했대요. 어디에서 장사를 하냐.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목소리를 듣고 아시는 분들이 있어요. 방송국 좀 갑시다. 방송국, 뭔 일로? 가만있어봐. 아짐 아니여? 아따 목소리 듣고 대번에 알아부러. 그라믄 어디서 장사하냐고. 오쇼만은 찾기는 힘들 거예요, 그러죠. 택시 기사분들이 엄청 좋아하세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진짜 서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니까 긍께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인기 정말 많으시다고. “광주에서 지정남 모르면 간첩”이라던데요. =뭐, 그 정도까지. 시골에 가면 할배랑 할매들한테 전지현이라고. (좌중 폭소)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제가 사투리 때매 먹고살잖아요. 신명도 전라도 표준말, 사투리만 써요. 요새 서울 사람들 만난다고 많이 순화됐지만. 맨 처음에 <얼씨구학당>에 패널로 나갔어요. 마당극 배우니까 시킨 대로만 안 하잖아요. 애드립 이런 거 짜고. 아줌만께 저기 아재 있음 어메, 조케 생겼어. (웃음) 아저씨들이 좋아하죠. 광주 지역에도 지역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사 프로가 필요했고 우리 전라도 사투리로 했으면 좋겠다 했는데, 여러 가지가 맞은 거예요. 시사적인 시각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우리는 통일문제, 비정규직 문제 다루다 보니까 계속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작가 언니가 무슨 이야기하면 어이, 알았어 하고 내가 더 세게 해불고. 그래서 작가가 대신 욕 얻어먹고. (웃음)
-마당극 배우로서, 방송인으로서, 엄마로서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 아이를 잘 키워봐야죠. 오늘도 왜 늦게 출발을 했냐면 동네 아이들이 분교로 다니거든요. 학교가 멀어요. 그애들을 배달을 시키고 온 거예요. 일상에서 애들 배달 잘 시키고 학교생활 잘하게 하고. 애들이 듣는 방송 좋은 것 좀 나오게 하고. <말바우아짐> <신얼씨구학당>이 꼭 훌륭하다는 건 아니지만(웃음) 지역민들, 서민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프로그램 계속 나오게 하고. 독립영화 좋은 거 있으면 누리게 하고. 좋은 연극 보여주고. 근데 이게 한국에서는 불가능하잖아요. 걱정되잖아요. 그걸 보여줄 수 있게끔 싸울 때까지 싸우는 거죠. 일이면서 삶이면서 놀이면서 그런 것 같아요. 아이를 지키는 것이고 돈을 버는 것이고 세상을 지키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