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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당신의 확신을 고발한다

확신에 대한 두 드라마 <다우트>와 <프로스트 vs 닉슨>을 읽는 새로운 독법

올해도 아카데미 시즌을 전후로 흥미로운 미국영화들이 많다. 그중에서 시간이 좀 지났지만 배우들의 황홀한 연기를 제외하곤 더 말해지지 않은 영화 <다우트>, 닉슨 연기로 호평을 받은 프랭크 란젤라에 대한 관심 이외에 다른 초점이 부가되지 않는 <프로스트 vs 닉슨> 두편에 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두 영화는 서로 의식하고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면서 뒤늦게 <다우트>에 관해 더 깊게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고 둘을 짝지어 어떤 문제를 말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갖게 됐다.

<다우트>는 1964년 브롱크스 지구에 있는 성 니콜라우스 가톨릭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이 학교의 근엄한 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는 폴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라는 자유분방한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때 젊은 제임스 수녀에게서 폴린이 도널드라는 흑인 소년을 추행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는다. 알로이시스는 폴린의 죄를 밝히려고 하고 폴린은 죄가 없다며 항변한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토크쇼 진행자 프로스트(마이클 신)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프랭크 란젤라) 전 대통령의 1977년 5월 TV대담이 성사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프로스트는 부패한 거물급 정치인 닉슨을 발판삼아 스타덤에 오르고 싶어 하고 닉슨은 만만해 보이는 연예인 프로스트를 자기의 정계 복귀를 위한 제물로 본다.

양측이 맞붙는 ‘대(vs)’의 구도에 주목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지금 설명한 이름들이 이 두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알로이시스 수녀, 폴린 신부, 혹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닉슨, 혹은 프로스트와 닉슨에 관한 이야기를 본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 인물들의 정보에 관하여 우리가 한정적으로만 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그 점을 제목으로 명시한 것 같다. 그리고 비록 <다우트>가 제목에서 명시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부제를 알로이시스 vs 폴린이라고 붙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정확하게 프로스트 vs 닉슨, 알로이시스 vs 폴린의 이야기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인공은 어떤 상태, ‘대’(versus)다. 두 영화는 마치 승패를 건 승부차기처럼 진행된다.

두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주목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역량 때문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이 ‘대’의 구조 안에서 전개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들을 보고 명연기를 말하는 것은 배우가 인물의 내면에 대한 끈을 풀어낸 것에 대한 감동이기보다 그들의 승부가 얼마나 표면적으로 팽팽하게 상연되었는가에 관한 사후 진술이 된다. 그러므로 우선 질문은 ‘대’의 상태가 어떻게 매력적으로 전개되는가, 승부의 긴장감은 어떻게 진전되는가, 이다. 이때 두 작품 모두 성공한 연극을 영화로 옮긴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다우트>가 연극에서 영화로 곧장 건너온 것에 비해 <프로스트 vs 닉슨>은 애초 대담을 사칭한 텔레비전 TV쇼에서 연극으로 그 다음 다시 영화로 바뀌어왔다는 차이가 있다.

<다우트>는 배우들의 곡예 같은 대사로 빈칸을 만들어 의문의 눈덩이를 굴린다. 이 영화의 문제제기와 그 해결법이 전부 그 방식 안에 있다. 제임스 수녀가 먼저 플린 신부의 의심쩍은 행동을 말로 옮겼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하느냐는 폴린 신부에게 말한다. 창밖으로 보았을 때 한 소년이 당신이 잡은 팔을 뿌리치는 걸 보았다고. 그때 알로이시스 수녀는 폴린 신부가 소년에게 한 말을 듣지 못했다. 폴린 신부는 말썽쟁이 소년에게 훈계를 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하고 상황을 넘겨다본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것을 유혹의 현장으로 본다. 이를테면, 사건의 중심에 선 흑인 소년 도널드의 증언이 있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영화에서 아이는 증언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알로이시스 수녀가 들이민 증거도 다른 교구에 전화를 걸어 뭔가 폴린 신부의 비리를 확인했다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때 폴린이 주춤거린다. <다우트>에서 빈칸은 말로 시작되어 말로 종결되며 긴장은 이 사이에서 벌어진다. 배우들이 그 말을 상연한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좀 다르다.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립각이 특별한 숏(중계방송의 숏)으로 시작해서 그걸로 정점을 맺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초반부 닉슨의 사임에 관한 정황을 알리는 뉴스들이 흘러나온 뒤 사임 연설의 녹화가 다 끝날 때까지 영화는 닉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헬기를 타고 떠나는 닉슨이 대중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을 프로스트가 브라운관으로 볼 때, 그때 마치 닉슨은 프로스트에게만 짓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낸다. 물론 프로스트의 오해다. 하지만 그때 프로스트가 닉슨을 만나야겠다는 운명적인 생각을 갖게 된 거라고 영화는 보여준다. 그때까지 왜 닉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지에 관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닉슨의 얼굴을 우리는 이제야 처음 확실하게, 그것도 사임 연설을 하는 그곳의 현장에서가 아니라 떠나가는 현장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보는 것이다. 중요한 건 브라운관 안에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프로스트와 닉슨의 첫 만남은 닉슨이 결정적으로 패한 걸 알리는 TV토론회 중계방송의 그 문제의 클로즈업으로 연관된다.

무승부입니까, 승패가 갈렸습니까

<다우트>는 영화가 연극을 무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때 말에 힘이 생긴다. 반면 <프로스트 vs 닉슨>은 텔레비전 중계를 연극화한 것을 다시 영화적 무대화로 옮긴다. 이때도 말은 중요하지만, 방점은 클로즈업에 찍힌다. 긴장의 정점에 마침표를 찍는 방식이 서로 다르며 각각 흥미로운 선택이다. 그러니 이것을 승부차기이지만 승부차기를 진행하는 룰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질문은 있다. 대결의 구도를 전제한 상태에서 마침내 다시 돌아와 공통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관심사는, 그러면 누가 승자인가 하는 점이다. 그건 괜한 질문이기보다는 이 영화가 제기한 구조를 따라 영화를 본 우리의 정당한 의문이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재현의 장치가 다를지언정 이 점은 결국 누가 진실에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가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중요해진다.

이때 개인적으로는 이미 알려진 평가들에 공감하지 않는다. 가령, <다우트>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견과 <프로스트 vs 닉슨>을 부패 정치가들이 보고 배울 점을 찾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 말은 <다우트>를 보고 나면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기 어렵고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고 나면 승자가 확연해진다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다우트>가 확고하게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준 영화이고, <프로스트 vs 닉슨>이 반대로 진실을 미루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우트>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대립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결과가 무승부라는 뜻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에서는 엄연히 마지막에 닉슨을 사각으로 몰아넣어 항복 선언을 받아낸 프로스트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다우트>는 무승부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초반에 영화는 플린을 교인들 앞에 선 웅장한 강연자로 보여준다. 알로이시스는 그 반대편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는 구도로 잡는다. 플린 vs 알로이시스의 대항 구도를 예고한다. 내내 폴린은 활기차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신부로 알로이시스는 과거에 붙잡힌 보수적인 옹고집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건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영화에는 이런 신도 있다. 두 사람의 식탁을 비교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노골적으로 우리의 판단에 혼란을 요구한다. 특히 폴린 신부의 식탁으로 화면이 넘어갔을 때 화면 가득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벌건 핏물이 배어 있는 고깃덩이, 그리고 그걸 포크로 집어 먹으며 느끼한 웃음을 흘리면서 뚱뚱한 두 모녀에 관해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이는 폴린 신부의 모습은 그를 사악한 자로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알로이시스 수녀가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가려 할 때 폴린은 왜 그녀를 못 가게 막은 것인가. 그것은 그의 죄에 대한 인정인가, 아닌가. 이때 그 고기의 살점과 느끼한 농담의 잔상이 끼어들게 되고 그의 무죄를 믿기에 석연치 않다. 혹은 알로이시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행동이 옳은 일을 한 이후에 오는 허망함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오해에 대한 인정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런 뒤죽박죽의 정황들이 알로이시스 vs 폴린이라는 구조에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다우트>는 의심이 아니라 ‘회의’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이 영화의 다우트라는 단어의 뜻이 의심과 회의(懷疑)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다우트>라는 말을 전적으로 의심이라는 말로 풀이하고 이 영화를 볼 때 오해가 생긴다. 결정적인 건 영화의 첫 신과 마지막 신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에서 다우트라는 말은 첫 신에서 폴린 신부가 사용한다. 그때 그의 강론의 요지는 ‘회의가 확신만큼 단단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신이 지나서 다우트라는 단어는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신, 알로이시스 수녀의 신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 이 영화가 말과 단어의 적확한 사용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그들은 진실을 두고 그렇게나 다투는 그 사이에도 의심(다우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확신(certainty)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확신을 갖고 있다거나 당신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서로 논쟁한다. 폴린을 의심하는 알로이시스의 행위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영화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과 그 확신에 대한 회의에 관한 것이다. 폴린 신부는 첫 신에서 신앙적 회의를 믿으라 했다. 그런데 알로이시스는 의심을 가장한 확신을 영화 내내 밀어붙인 다음 결국에는 폴린 신부가 가르친 그 회의의 순간으로 이끌린다. 이 구조에 따른다면 첫 번째 신에서 있었던 폴린 신부의 강론, 즉 회의는 확신만큼 힘이 있다는 말을 마침내 가장 귀기울여 들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알로이시스 수녀다. 누가 죄를 지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말에 승복하였는지는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알로이시스가 폴린의 강론에 따라 자기의 확신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으로 끝나는 구조다. 그러므로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의심이 들어요 정말 의심이”보다는 “(그동안 확신을 해온 것에) 회의가 들어요, 정말 회의가”라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인가. 누구의 강론을 따라 고백하는가. 영화는 이미 말해준 것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결국 무승부

반면 <프로스트 vs 닉슨>은 프로스트의 승리인가. 역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다우트>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무승부다. 이 과정은 좀더 간단하며 많이 보아온 것이다. 물론 기록상 닉슨은 그 토론회에서 패배했다(프로스트와 닉슨의 대담은 클립의 일부나마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 다시 제안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이 영화가 제안하는 효과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닉슨을 미워할 수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닉슨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걸 외면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 vs 닉슨>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즉 <다우트>에서 폴린 신부의 식탁을 보여준 것처럼 갑자기 끼어들어 혼란을 유도하고 전환을 시도하려는 장면인데 효과는 그 반대다. 닉슨이 술에 취해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 우리는 이 장면을 나중에야 그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고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그 신의 출현 즉시에 아는 것과 그 뒤에 알게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장면은 의외로 그의 곤경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계기를 낳는다. 그건 닉슨이 대담이 모두 끝난 뒤에 프로스트가 그를 찾았을 때 둘만 얘기하고 싶다며(즉 중계방송이 아닌, 진정 사적으로) “내가 정말 그날 밤 전화를 했느냐”고 묻기 때문에 인간적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그전까지 일말의 교감도 통하지 않는데 결국은 이 한밤의 전화통화로 교감을 성사하고, 유능한 서로의 적으로 마지막 대전을 치른다.

결과는 프로스트의 승리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아닌지 모르는 이 장면이 실제 기록된 닉슨의 패배자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훨씬 더 강하게 닉슨을 구제하는 동조감을 조성한다고 본다. 영화적으로 볼 때 둘은 경쟁구도에 있지만 이해할 만한 친구의 위치로도 격상한다. 닉슨은 죄를 지었지만 적어도 인간이기에 끌어안을 만한 사람이 된다. 정작 이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닉슨의 무엇이 무마되고 있는가이다.

닉슨은 토론회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법이라도 대통령이 하면 그건 불법이 아니다.” 뒤이어 그걸 후회하는 말을 했다고 해도, 그건 닉슨의 불변의 확신이다. 닉슨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텔레비전에서 자기의 불법적 확신을 근거없는 방식으로 피력한 인물로 기록되었는데(거기에 비견할 만한 인물은 부시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지는 그의 클로즈업은 그의 무서운 확신을, 그에 대한 패배를 은연중에 인간적인 왜소함의 얼굴로 돌려 무마하는 효과를 낳는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은연중에 나쁜 확신에 대한 무마가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한 말,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확신이 이때 겹친다. 한 번의 확신(<다우트>)과 또 한번의 확신(<프로스트 vs 닉슨>), 알로이시스의 확신과 닉슨의 확신. 이것이 이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승부를 겨룬 쟁점이다. 승부차기 결과 알로이시스가 지고 닉슨은 가까스로 무승부를 기록한 것 같다.

어째서 둘 다 1960년대인가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닉슨은 1960년 대통령선거 TV토론회에서 “입술 위의 땀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빼앗겼다”고 말하는데, 그때 대통령직을 앗아간 건 존 F. 케네디였다. 그리고 영화 속 폴린 신부의 말에 따르면 <다우트>는 케네디 암살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인 1964년을 무대로 한다. <다우트>의 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는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살상 무기가 있다고 확신하고 이라크에 침공하는 걸 보고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했고, 시대를 1964년으로 돌려놓았다. 두 영화의 시간대가 우연이라 해도 이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것이다.

<다우트>의 폴린 신부는“확신이 든다고 해도 그건 감정이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반문했다. 우리는 여기서 폴린을 케네디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폴린은 그저 망설임을 아는 사람이다. 망설임 없이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무섭고 위험하다는 걸 지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 영화적인 것 외에 판단의 문제를 개입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다만 <다우트>와 <프로스트 vs 닉슨>은 어떤 확신, 그러나 우화 안에서의 확신과 더 명료하게 남은 역사 안에서의 나쁜 확신의 사례로서 서로 근접하여 비춘다. 확신에 대한 두개의 드라마.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우화이며 또 하나는 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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