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곡예에 단련된 오늘날 관람객은, 웬만한 도발에는 뒷목을 잡지 않는다. 니콜라 콘스탄티노의 <젖꼭지 코르셋>도 멀찌감치 보면 약간 아리송한 작품에 불과하다. 미술관에 웬 란제리? 우리가 질겁하게 되는 시점은 검정색 토르소 마네킹에 입혀진 코르셋에 약 1.5m 거리까지 근접했을 무렵이다. 고급 핸드백에 쓰이는 타조 가죽으로 보였던 코르셋의 소재가, 실은 인피(人皮)- 의 모사품- 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젖꼭지 코르셋>은 수많은 유두로 뒤덮인 사람의 피부로 제작한 상상의 코르셋이다. 악취미! 살벌한 ‘추억의 명화’ 두편이 대뜸 떠오른다.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와 재봉을 즐기는 연쇄살인자 버팔로 빌이 등장하는 <양들의 침묵>이다. <고무인간의 최후>에서 지구인의 몸은 외계인들의 패스트푸드 식자재였다.
니콜라 콘스탄티노는 실리콘과 폴리우레탄을 조형하는 특별한 기법으로 유사 인피를 만들어 다양한 의류와 잡화를 제작했다. 젖꼭지가 돋을새김된 코트와 이브닝드레스, 항문 무늬의 토트백 등을 부티크를 본뜬 갤러리에 진열했고, 한번은 아예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심지어 아티스트 본인의 체지방을 포함한 몸 비누(Savon de Corps)도 작품 목록 한쪽을 차지한다. <젖꼭지 코르셋>을 비롯한 콘스탄티노 작품이 지피는 불쾌감의 정체는 두 가지다. 흡사하지만 똑같지 않은 복제품을 볼 때 돋아나는 소름이 하나고, 사물이 제자리를 벗어나 금기된 용도로 쓰이는 광경이 부르는 섬뜩함이 두 번째다. 요컨대 인간이 ‘재료’로 이용된다는 아이디어는, 우리가 가진 줄도 미처 몰랐던 비위를 건드린다. 완제품 소비자인 인간의 눈에, 생산 공정은 은폐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제품의 원료가 인간의 뼈와 살, 가죽이라고 상상하면 사고방식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니콜라 콘스탄티노의 고국은 식육 산업과 피혁 산업이 성한 아르헨티나다. 그녀의 초기작은 육식을 위한 도축과정을 묘사했다고 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과정에는 살생이 도사리고 있다. 콘스탄티노는 눈에 보이지 않고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모른 체하는 삶의 한 속성을 일깨운다. 또한 (죽은) 사람의 가죽으로 바느질된 드레스와 구두는, 패션이 희구하는 영원한 청춘과 성적 매력의 꿈에 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귓전에 속삭인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들여다보면 콘스탄티노의 작품에 표현된 유두는 예외없이 남성의 것이다. 여성과 달리 수유 기능이 없는 남성의 유두가 갖는 함의는 ‘성감대’로 집중된다. 몸통 전체가 유두로 덮인 <젖꼭지 코르셋>은 쾌락의 극대화를 약속하지만 동시에 몸의 주인을 옥죄고 괴롭히는 형틀이다. 이 대목에서 <젖꼭지 코르셋>은 성적 흥분을 강요하는 암시가 홍수를 이루면서도, 그것이 거꾸로 강박으로 작용하는 현대사회의 기이한 형국을 매우 선정적으로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