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해운대 센텀시티에서 한국 최초의 원스톱 후반작업시설이 개관했다. 이날 국내외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DI(디지털색보정)팀에서 색을 잘못 처리했어요. 그러니까 저희 책임이 아니에요.”(CGI업체) “무슨 소리! 우리가 맞는 색으로 조절해서 드렸는데, CGI(컴퓨터그래픽)쪽에서 다 바꿔놨잖아요. 당신들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 돼요.”(DI업체)
이것은 영화 후반작업에서 가장 비중이 큰 DI와 CGI가 서로 다른 업체에서 진행돼왔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업체마다 색에 대한 기준과 데이터가 다르다보니 감독 입장에서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몰라서 난감하고,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진행이 더뎌서 괴롭다. 그러다보니 영상의 질이 기대했던 것만큼 나오지 않는다. 현재 충무로 후반작업의 이런 일반적인 풍경은 이제 점차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DI와 CGI를 비롯한 후반작업의 모든 공정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 2월23일 이곳에서 <박쥐>의 CGI 최종 시사를 마친 박찬욱 감독은 “집중력있게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며 새로운 시설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부산-서울 초고속망 통해 시간·비용 절감
2월24일 부산시와 부산영상위원회(이하 ‘부산영상위’)는 ‘부산영상후반작업시설’의 개관식을 열었다. 322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8236㎡의 규모로 지어진 이 시설물은 국내최대 규모의 후반작업시설인 동시에 국내 최초의 원스톱 후반작업공정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편집, 사운드 시설이 완비될 2011년부터는 DI, CGI, 디지털 마스터링, 고전영화 복원 등과 함께 완벽한 후반작업 시스템이 갖춰질 것으로 보인다. 운영은 부산시를 대신한 부산영상위와 국내 유명 후반작업업체인 (주)HFR이 공동 출자한 (주)AZ웍스가 맡는다.
이 시설의 가장 큰 의미는 한국영화 후반작업에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CGI 담당 연출부가 감독과 DI, CGI업체 사이를 오가며 복잡하게 후반작업을 진행했던 이전과는 달리 이 시스템에서는 DI와 CGI가 한곳에서 진행된다. 그 결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하게 됐다. 이곳에서 최초로 DI와 CGI를 작업한 <박쥐>의 정정훈 촬영감독은 “멀티플렉스 극장과 같은 크기의 스크린을 통해 데이터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오차를 줄일 수 있는 점”을 강점으로 꼽았다. 뉴질랜드 파크로드에서 <남극일기>의 후반작업을 했던 그는 “뉴질랜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며 “이젠 한국영화 후반작업도 ‘감독 중심’의 시스템으로 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시스템에서는 감독이 원하는 아이디어를 바로 시도할 수 있는 등 스탭들이 감독 중심으로 움직인다.
제작 진행에서도 진일보하게 됐다. 부산-서울간 초고속망을 통해 부산에서 작업한 결과물을 서울의 사무실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쥐>의 안수현 프로듀서는 “일일이 부산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고, 한곳에서 모든 후반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시간,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 제작비 중에서 후반작업의 예산이 가장 빠듯한 점을 감안한다면 원스톱 후반작업 시스템은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자나 프로듀서에게도 비용을 절약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이로써 부산은 10년 만에 ‘프리 프로덕션(로케이션 헌팅 데이터 구축, 촬영 유치)-프로덕션(수영만 부산촬영스튜디오, 촬영 지원)-포스트 프로덕션(부산영상후반작업시설)’으로 이어지는 영화제작의 전 공정을 아우르게 됐다. 박광수 부산영상위 위원장은 “부산이 영상산업도시로서 한 단계 도약했고, 한국과 아시아 영화산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음”을 밝혔다.
일본·중국 영화제작사도 관심 표명
2월25일 해운대 센텀호텔에서 열렸던 부산영상위 설립 10주년 기념 토론회 ‘미리 보는 10년 후 부산영상산업’은 부산이 꿈꾸는 미래가 무엇인지 엿보는 자리였다. 토론에 따르면, 부산은 10년 뒤 ‘주요 제작사와 영화인들의 30%가 부산으로 이전, 이주하는 것’과 ‘한국영상산업은 서울·경기권, (부산·울산·경남(이하 부울경)과 동남권의 양대 축으로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부산이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날 서울 영화인 대표로 참석했던 김성수 감독은 “침체된 한국영화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확산되고 넓어져야 함”을 강조하면서 “부산의 영화제작 인프라를 아시아에 어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월25일에 열린 ‘미리 보는 10년 후 부산영상산업’ 토론회.
실제로 부산에서의 후반작업을 고려하는 일본 및 중국의 영화제작사가 늘었다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 장즈량 감독의 <묵공>을 제작한 일본 다라콘텐츠의 이세키 사토루 프로듀서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부산은 지리적인 이점을 토대로 올해 열릴 제2회 아시아 정책포럼은 물론이고, 앞으로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영화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일본에 비해) 저렴한 비용과 훨씬 뛰어난 기술력’을 이유로 “부산에서 차기작의 후반작업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부산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해왔다. 이제는 원스톱 후반작업시설이라는 새로운 실험이 침체된 한국영화산업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기대해볼 때다.
박광수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어떤 영화도 이곳에서 다 끝낸다”
-이제는 제작부가 부산에서 촬영한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서울로 공수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건 아니다. 아직은 현상을 비롯한 필름작업은 안 한다. 물론 장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현상 공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CJ CGV, 롯데시네마를 중심으로 빠르게 디지털시네마로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상소 건립을 결정해도 몇년이 걸린다. 그래서 일단 현상소는 보류했다. 차후 상황을 봐서 판단하고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개관으로 부산영상위는 프리 프로덕션-프로덕션-포스트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갖췄다. 단순히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닐 텐데. =원스톱 후반작업시설은 부산영상위를 설립할 때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부산영상위의 설립 목적이 ‘촬영 유치’가 아닌 ‘부산을 영상산업도시로 이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촬영 유치를 통해 부산에 촬영하러 많이 오면 영화산업과 관련된 회사들이 자생적으로 생길 것이다. 그러면서 촬영지원 시스템을 구축하여 단계적으로 마지막인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2월25일에는 국내 최대 동남권 촬영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부산·김해·진해·합천간의 MOU(양해각서)가 체결됐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을 묶으면 어떤 영화도 이곳에서 다 끝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부울경’ 지역에는 도시, 시골, 바다, 산, 섬 등 모든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10년 뒤에는 ‘부울경’ 지역권이 서울·경기권과 함께 한국영화산업의 양대 축으로 형성되는 것이 목표다.
-정책적으로 참고했던 모델은 무엇인가. =큰 모델 중 하나가 캐나다의 밴쿠버다. 캐나다는 2천만명의 적은 인구 수, 빈약한 예술시장 등 자국 영화산업이 건재하지 않은데도 촬영 로케이션, 포스트 프로덕션으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다. 그리고 할리우드팀들이 밴쿠버에서 작업하면서부터 캐나다 영화인들의 기술력이 향상되고, 자국 영화시장도 조금씩 성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