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장관(왼쪽 사진)이 참석한 이날 간담회에서 독립영화인들은 흔치 않은 기회를 맞아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2월12일 오후 5시 광화문 미디액트에서는 이례적인 자리가 마련됐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독립영화인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 것. 이 자리는 전날 6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열었던 ‘독립영화가 살아야, 한국영화가 삽니다!’라는 기자 간담회에 대한 유인촌 장관의 응답인 셈이다. 2월11일 6명의 감독은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독립영화조차 ‘수익을 올려야 하는 영화’로 잘못 인식될 것을 우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독립영화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이 축소되는 것에 대해서 성토했다.
영진위에 대한 옐로 카드로 해석?
유인촌 장관은 배우 출신답게 영화계에 대한 견해를 자신있게 피력했다. 그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은 필수적이라면서도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강조해 기존 지원제도에 얼마간 손을 댈 의사를 내비쳤다. 한편, 아무리 주무부처라지만, 문광부 장관이 직접 독립영화 감독들의 목소리에 응답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워낭소리>가 대성공을 거두고 있고, <똥파리>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VPRO 타이거상을 수상하는 등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높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이날도 여러 차례 지적했듯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영진위에 대한 옐로 카드 차원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이날 간담회가 끝난 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은 “아직 구체적인 생각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주무부처 장관이 우리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는 사실 자체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유인촌 장관과 고영재 사무총장을 비롯해 <동백아가씨>의 박정숙 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극장체인 씨너스의 정상진 대표, 미디액트 김명준 소장 등이 참석했다.
유인촌: 아침에 매체에 기사가 많이 나서 깜짝 놀랐다. 뭔가 해서 영진위에 전화했더니 영화진흥위원회 강한섭 위원장은 베를린영화제에 출장 갔다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사실 장관에 취임했을 때부터 독립영화에 대해서는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업영화는 이제 관이 개입해서 중흥하는 단계는 넘어갔고 산업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굴러가야 한다고 봤는데, 단편영화나 독립영화는 영화산업의 밑받침이 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진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러다 기사를 보니까 독립영화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왜 여태까지 이야기하고 밀고 왔던 방향과 다른 결과가 나오나. 특히 요즘 <워낭소리>가 흥행도 되고 관심도 끌고 있는 마당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를 만든 지 10년이 조금 넘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장관님을 뵙는다. 이런 기회가 마련돼 좋게 생각한다. 독립영화는 수치와 지표로 판단할 수 없다. 예산문제로 기획재정부 관계자분들을 만나도 독립영화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많이 바뀐 것을 느낀다. 독립영화에서 무슨 수익을 이야기하냐고 말하는 분도 있고, 마케팅 같은 부분을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영진위는 독립영화 개봉지원사업을 폐지했고,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산은 몇년째 6억원으로 고정돼 있다. 그리고 ‘독립영화’라는 이름을 뺀 이유와 근거도 모르겠다. 두 번째로 그동안 다양성 영화 복합상영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오고갔는데, 규모를 지나치게 확대하려다가 영진위 부산 이전 문제와 뒤얽혀 올해를 넘겨버렸다.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사업이다. 또 미디액트, 독립영화 전용관, 시네마테크 운영을 놓고 공모제를 실시한다는데 이 또한 이해가 안된다. 지정위탁을 맡겨놓고 그 성과가 나쁘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데다 독립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안정된 공간이 확보된 상황도 아닌데 공모제를 실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책이라는 건 결국 동의와 설득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 언로가 막혀 있고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다 독립영화 관련 조항이 자꾸 삭제되니 어제 같은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
영화인들 “검증된 작품의 마케팅 지원을”
김명준: 한편으로는 <워낭소리>가 독립영화를 ‘굶어가면서 영화를 만들어 몇 십억원 버는 영화’로 인식되게 할까 걱정된다. 그런 영화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이고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본래 의미에서의 독립영화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처럼 독립영화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 우리의 바람은 영진위가 현장에서 논의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관광체육부와 이야기를 하고, 또다시 조율된 의견을 현장에 전하는, 즉 설득과 동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박정숙: 우리 스스로 독립영화 감독의 삶은 아르바이트 인생이라고 말한다. 짬짬이 촬영이나 편집 일을 하면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가 생겼다. 그때 나의 <소금>이 사전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는데, 600만원이라는 지원금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영진위라는 국가기관에서 이런 주제에 동의하고 뽑아줬다는 것 자체가 감독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됐다. 사실 독립영화를 한다고 생각하는 누구나 스스로가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려 하지만 지원을 받으면 책임감을 더 갖게 된다. <동백아가씨>는 개봉지원작으로 선정돼서 지난해 극장에서 개봉했다. 게다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2008년 올해의 좋은 영상물로 뽑히기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제도가 없었다면 관객을 만날 기회가 없었고, 이렇게 선정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영재: 참고로 말하면 <워낭소리>가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 후보작으로 선정됐는데 개봉이 안됐으면 아예 후보작 자격도 얻을 수 없었다.
왼쪽부터 씨너스 이채 정상진 대표,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 박정숙 감독.
유인촌: 독립영화, 예술영화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극장이 여러 곳 있지 않나. 25군데의 아트플러스 체인이 있는데, 그런 데서도 개봉이 잘 안되나.
정상진: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는데 그곳만으로는 독립영화가 일반 관객과 호흡하기 어렵다. 지역적으로 봐도 시내 중심가에는 거의 없고. 지원받는 극장들이 열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원받아서 극장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관객과 호흡할 좋은 독립영화가 많은데도 관객이 외면하는 것은 사실 홍보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초반부터 <워낭소리>를 개봉했지만, 개봉 초기에는 많은 정보가 없어서 관객이 선뜻 표를 사지 못했다. 검증된 독립영화의 마케팅을 지원해주면 다양한 멀티플렉스나 상업영화 공간에서도 영화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영재: 제작자 입장에서는 단관에서 개봉을 해도 포스터와 전단만 만들어도 700만원 정도의 마케팅비가 든다. 여기에 광고라도 조금 내면 그냥 2500만원에서 3천만원이 넘어간다. 극장이 아무리 많아도 홍보가 안되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양익준: <똥파리>를 준비하면서 내 개인 돈을 다 썼고, 촬영을 하면서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돈을 꿨다. 그러던 와중에 고영재 프로듀서를 만났다. 결국 <워낭소리>가 벌어들인 돈으로 4월 중 개봉하게 됐는데, 어제 기자회견에서도 말했듯 내 방 보드판에는 돈을 갚아줘야 하는 사람 20명의 이름 쓰여 있다. 빨리 로테르담 상금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내겐 상보다 상금이 절실하다. 그리고 7개월 동안 나와 함께 작업한 스탭들에게 거의 한푼도 임금을 주지 못했다. 개봉을 못하면 그들에게 일말의 인건비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장관 “확실한 쪽을 밀어주는 게 낫지 않나”
유인촌: 여러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지원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적은 액수의 지원을 하는 것보다 확실한 쪽을 밀어주는 게 낫지 않겠나. 나머지에겐 인큐베이팅의 기회를 주면 된다. 시나리오 한장부터 조금씩 발전시켜서, 한 단계를 거치면 조금 더 지원하고 더 가능성이 보이면 더 지원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상이라든가 좋은 성과를 낸 작품에 대해서도 지원을 해주면 된다. 영진위쪽에서 듣자하니 개봉지원을 없앤 데 이유가 있더라. 그런데 그게 현장과 잘 맞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점을 영진위가 좀더 해줬으면 좋겠다. 머리를 맞대고 잘 논의를 해서 다음에 또 이런 자리를 갖자. 지금 <워낭소리>도 잘되는데 이럴 때 바람을 타는 게 좋지 않나. 힘을 받을 수 있게 서로 노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