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뉴스 속 인물을 보면 말하는 내용 말고 표정이나 눈빛, 제스처, 기타 등등의 정보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짐작하게 될 때가 있다. 최근에는 입술이 온통 부르튼 민주노총 대변인을 보면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버거운 일일수록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정해 연습하는 것도 좋다. 합리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생존 기술이다.
돌봄 노동이 ‘쥐약’인데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기능적인 인간인 나는(사실 타고난 돌봄 노동자가 어디 있겠냐만) 육아와 살림에 직면해서 최대한 일과 관계를 단순화했다. 그래야 부대끼지 않으니깐. 우선 아이는 업무(!). 남편은 파트너, 부모는 주주, 시부모는 거래처…. 세상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집단이 생존해나가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를 단순화해야 한다. 에누리 없는 그 단순화의 결과가 ‘법과 원칙’이다. 성폭력에는 피해자 중심주의, 살인에는 그야말로 법질서!
검찰은 철거민 단체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용역들을 끼워넣기 처벌하는 정도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 하고, 국회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의원들이 앞다퉈 마이크를 쥐고 “알카에다식 자살테러” 운운하며 사망자들을 반복해 죽이는 동안, 국정원장 후보자는 무차별 정치사찰을 하겠다고 밝히고 경찰은 최루탄 사용을 10년 만에 재개할 채비를 했다.
청와대와 국회와 공권력 언저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듣자니, 한때 ‘쓰는 단어가 20개’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잘 모를 말을 들었던 박근혜 의원이 문득 생각난다. 말을 아끼고 가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정치적으로 벼락출세한 이들과 아닌 이들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압축성장기를 거치면서 부동산 졸부만큼이나 정치적 졸부가 양산됐다. 부동산 졸부는 뼈저린 주류 콤플렉스라도 있지만 정치적 졸부의 인정투쟁 대상은 자신을 낳은 부동산 졸부뿐이다. 방향은 없고 속도만 있는 이 정권의 실체적 진실은 바로 이거다. 감히 세입자들이 집주인들의 재산증식을 방해하다니.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때린 해머’의 증거로 전철연의 목덜미가 잡혔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재산증식의 자유다. 이 자유는 증식할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용산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국민’, ‘법질서’, ‘윤리’ 강조가 귓가에 서걱거린다. 씻어도 씻기질 않는다. 이런 게 바로 폭력의 2차, 3차 피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