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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가 만난 사람] 시인 김경주

취한 말(語)들의 시간

오역이 허우적거리다 머릿속의 종을 울릴 때가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Society)의 제목이 그렇다. 뭐랄까 원제보다 훨씬 시적이다. 팍팍한 우리 교육현실을 이입해서 보는 통에 실제보다 찬란한 영화로 새겨진 한국 관객의 기억과도 썩 어울린다. 시가 마지막으로 일상 화제에 오른 것이 언제더라 더듬으니 부끄럽도록 아득했다. 그래서 다시 중얼거려보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

시를 청춘의 암호쯤으로 아는 둔한 독자들이 이반한 사이에도, 시인과 시들은 들꽃처럼 태어났다. 지난해 10월 두 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발표한 김경주는,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김민정(<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등과 더불어 시단의 청량한 바람으로 환대받는 시인이다. 김경주의 첫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 랜덤하우스 펴냄)은 출판사에 따르면, 시집으로서는 예외적으로 1만3천부 가까이 팔렸다. 더구나 김경주의 시는 누구나 기꺼이 어깨를 기댈 만한 달콤한 위무의 노래도 아니다. 이를테면 (내가 이해하기에) 연애시인 <연두색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 일부는 이렇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동료 문인과 평론가가 김경주의 데뷔작에 붙인 호의적 품평은 그 분량보다 수위가 무시무시했다.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권이 될 것”(시인·평론가 권혁웅), “걱정스러울 정도의 재능”(대산문학재단 창작기금 심사평)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읽는 입장에서도 걱정스러웠다. 이건 혹시 시인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 몰락시키려는 음모?

“소중하게 다뤄주십시오”라는 온라인 서점의 메시지가 적힌 택배 상자 속에 누워 도착한 김경주의 두 번째 시집은 겨울 바다에서 건진 생선처럼 차가웠다. 손이 움찔했다. 그 물고기의 이름은 물론 언어일 것이다. <기담>의 시는 난해하고 상처투성이라 멀미를 유발했다. 책장을 덮는 데에 <안나 카레니나>를 독파하는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술술 읽히지 않으면서도 질기게 스며들어 연명하는 시와 그 시인이 더 궁금했다.

김경주의 작업실은 마포구에서 토박이가 가장 많이 산다는 상수동 의류공장 지하에 단단히 매복해 있다. 이곳은 2년 전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결연해 꾸린 무경계 펄프 문화 연구소 ‘츄리닝 바람’의 둥지다. 구체적으로는 극장이자 기획실이며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바이고 작업 끝에 잠을 청하는 텐트다. ‘츄리닝 바람’의 소장인 김경주에게 연극, 영화, 음악, 출판은 시의 다양한 몸을 지어주는 작업인 것처럼 보였다. 어떤 환골탈태도 앗아갈 수 없는 에테르가 시 안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는 낮에는 기획자로 뛰고 밤이면 급진적인 시를 쓴다. 김경주의 말은 급류와 같았다. 김경주의 시가 리얼리즘보다 환상적 언어의 리얼리티를 편애하는 까닭은, 서른세해 동안 몸으로 겪어낸 현실의 숲이, 판타지를 목발삼아야 건널 만큼 울창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어림짐작이 스쳤다. 인터뷰어인 나는 무용하다 못해 물길을 훼방하는 돌부리가 된 심정이었다.

-추리닝을 입고 계실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웃음) =공연할 때만 입어요. ‘츄리닝 바람’이란 이름은 옷 자체보다 추리닝이 상징하는 바에 대한 오마주죠. 공연이 있을 때는 멤버 모두 의상으로 정해진 세계 각국 국가대표 추리닝을 입습니다.

-무경계 펄프 문화연구소 ‘츄리닝 바람’의 멤버들은 어떤 경로로 모였습니까? 취향의 공동체인가요? =오랫동안 서로 알아온 친구들을 시작으로 알음알음 모였어요. 신입 멤버 오디션에서는 “내일 신촌에 포장마차를 개업한다면 뭐라고 간판을 달겠는가” 같은 질문에 30초 내에 대답하라고 해요. 추리닝이 어울리는지 볼 수 있는 사진과(웃음) 자기를 표현한 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고 쓰는 감상문도 요구해요. 제 생각엔 브리태니커만한 강력한 상상력의 보고가 없는 것 같아서요. 커트 코베인 유서 번역과 거기에 대한 생각을 쓴 글도 받고요.

문학 초심자에게 희곡 공부부터 권한다

-여기 모인 음악, 영화, 사진 등 아티스트들과 집단창작도 하겠지만 평소에는 무엇을 주고받나요? 짐작하건대 현물로 서로를 지원할 것도 같고 각자의 팬을 자연스레 공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첫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1만부 이상 팔린 데에 그런 영향은 없었을까요? =저희는 대안가족 개념이 강해요. 파티나 공연을 하면 거의 품앗이고, 책 한권을 내면 다 같이 모니터링과 홍보를 돕죠. 책이 1만부 이상 팔린 데에도 사실 그런 요소가 있겠죠. 그런데 저는 1만부 정도는 팔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1만부의 인세가 500만원이니 첫 시집 나오기까지 10년 동안 쓴 A4 용지 값도 안 나온 셈인데, 그걸 대박이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때 ‘대박’이란 표현은 상대적인 것이겠죠. =요즘은 자력으로 베스트셀러될 수 있는 책이 사실상 없다고 봐요. 마케팅의 힘이 크고 특히 시는 마케팅 예산 자체가 잘 배정되지 않아요. 록밴드가 앨범 내고 순회공연하듯 스스로 텍스트를 갖고 돌아다니며 홍보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요.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저는 100권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쌓아놓고 플래카드 걸고 시위했어요. 몇 몇 출판사를 제외하곤 이제 거의 시집 출간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도 심각하지요.

-일종의 책임 방기라고 보시나요? =치명적이라고 생각해요. 출판사의 정체성과도 어긋난다고 보고요. 희곡은 더 어려운 상황이라 몇몇 작가와 같이 창작희곡을 살려보자고 이름도 없는 동인을 결성해 희곡 브나로드 운동 비슷한 것을 했어요. 저는 문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희곡부터 공부하라고 권해요.

-희곡이 문학 초심자에게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일단 희곡은 짱짱한 플롯 공부를 요구해요. 몇초만 잘못 운용해도 관객이 바로 알거든요. “이렇게 지루할 수가!”싶은 순간을 목격하는 작가의 수치감이란 엄청나서(웃음), 냉정히 자기 글을 검토할 수 있죠. 또 희곡은 시적인 정서를 들여올 수 있어요. 극장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가장 열린 것을 지향하는 매력도 있죠. 그러나 현재 대학로는 검증받은 작품을 한번 더 올리는 것이 창작희곡으로 망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팽배해요. 다양성 면에서 지금 대학로 연극의 질은 형편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예술가들이지만 텃세도 심해요. ‘츄리닝 바람’에서 하고 싶은 일 하나가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클럽에서 연극을 하며 맘껏 섞여 활동하는 환경을 만드는 거예요.

서울과 시골의 가장 큰 차이는 욕망이더라

-서울에는 언제 어떻게 올라왔습니까? =신춘문예에 당선된 2003년 가을에 고향 친구 세명과 함께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제게 외국 같았어요.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른 게 외국이잖아요? 말씨가 다른 데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열패감이 있어요. 전공이 철학이라 토론수업을 병행했는데 5분, 10분이 못 가 말투 때문에 다들 깔깔거리는 상황이 왔어요. 한때 표준어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생각마저 했어요. (좌중 웃음) 아버지가 군인 출신 경찰이라 여러 지방을 이사다니다 보니 제 말투가 이상하게 섞인 사투리거든요. 서울과 시골의 가장 큰 차이는 욕망이었어요. 지방에선 먹고 싶은 것들을 엄마가 대부분 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서울 오니 산딸기 케이크를 비롯해 눈에 보이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장난 아니었어요. 그런 건 엄마가 못해주거든요. (일동 폭소) 첫 시집 내기 전까지 서울에서 지내며 제가 제일 많이 중얼거렸던 말이 “먹고 싶다”였어요.

-혼자 있을 때 그 말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는 말이군요. =굉장히 가난했고 생계를 유지하며 수업을 받아야 해서 친구들과 교류도 없었고 점심도 도시락 싸서 먹었어요. 말씨가 다르다보니 길도 쉽게 못 물어봐서 담배 살 때만 입을 여는 실어증이었죠. 함께 상경한 문봉섭 감독(여행기 <레인보우 동경>의 공저자)과 흑석동 달동네 교회의 기도방을 빌려서 지냈어요. 주말이면 신도들 기도시간에 맞춰 방을 비우고 옥상에서 시간을 보냈죠. 문 감독을 포함한 친구 셋과 저의 서울 상경기는, 아는 소설가 형이 소설로 쓰고 싶다고 시놉시스를 200만원에 사갔어요. (좌중 폭소) 가제는 <한심한 것들>인데, 이는 친구 셋 중 한명이 활동한 밴드 이름이기도 해요.

-그래서 결국 상경기가 소설이 되었습니까? =작가 형이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나는 한국 문학을 너무나 아끼는 사람인데, 도저히 안되겠다. 네가 꼭 써다오”라고. (폭소) 한 친구는 취직이 힘들어 스물여덟까지 자장면 배달만 했어요. 전주에서 굉장히 유명했는데 아무리 바빠도 배달통 세 번째 칸에는 음식을 넣지 않고 반드시 시집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죠. 그 친구도 지금은 등단했어요. 나머지 한명은 고교 졸업 뒤 바텐더 일을 공부해 전국대회 입상도 한 친구인데, 전문 바텐더보다 젊은 아르바이트생을 선호하는 세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경력과 나이를 줄여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 밑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동안 유지하느라 애먹는 걸 보면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면이죠. (폭소) 요즘은 팝페라를 해보겠다고 연습하고 있어요.

월급 떼인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등단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2006년 첫 시집과 어린이책 <노빈손의 판타스틱 우주원정대>를 내셨고 2007년에 여행산문집 <패스포트>, 2008년에 두 번째 시집 <기담>을 포함한 세권의 책을 냈습니다. 생산성에 만족하나요? =사실 알려지지 않은 책과 번역서까지 포함하면 여남은권이에요.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는 책도 있었고 야설작가하면서 쓴 책도 있으니까. 제가 존경하는 시인 김정환 선생님은 책을 약 100권 내셨어요. 한국 문인들은 게으른 편이 아닌가 싶어요. 텍스트를 밖으로 확장시켜 활기차게 더 열심히 써야 하지 않을까 해요. 문단에 관행화된 주기가 있거든요. 단편집 먼저 내고 2년 뒤 장편, 첫 시집 내고 3년째에는 두 번째 시집 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그보다 빨리 쓰면 대충 썼다고 여기고, 늦으면 게으르다고 보는 풍토가 있는데 그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10대에 <대한매일> 배달하다 월급을 떼인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훗날 그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으로 1면에 보란 듯이 이름을 실었어요. 우연치고는 굉장합니다. =우연이 아니죠. 피해의식이었는지 응모할 때 꼭 그 신문에는 보냈으니까요. 신춘문예는 신문마다 심사 성향이 있는데 조선, 중앙, 동아는 당선작이 저와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한국일보>와 <대한매일>에 시와 희곡을 보냈어요.

-당시 당선소감에 그 사연은 쓰지 않았던데요. =당선소감은 당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같은 거였죠. (웃음) 짝사랑만 6년짜리, 7년짜리를 하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죠. 짝사랑한 여자에게는 편지를 한 800통 썼어요. 그 편지들 지금 제가 모두 보관하고 있어요. 정서하기 전에 쓴 초고들이죠. 스스로도 사악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글쓰는 일을 하고 살 생각을 꿈에도 안 했던 시절인데도 무의식적으로 언젠가 써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나봐요. ‘자아록’이라는 이름으로 중학생 때부터 쓴 노트도 30, 40권 있는데 이사할 때마다 대여섯개의 라면박스에 봉한 채 들고 다녀요. 한번도 개봉한 적은 없어요. 나이 들어 장력이 떨어지면 한번 꺼내볼 생각이에요.

말라리아 겪으며 글쓰기의 본질 깨달아

-아르바이트의 달인이라고 할 만큼 많은 일을 하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노동의 경험이 들어 있는 시나 산문은 적어요. =희곡에는 조금 쓰기도 했죠.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유년을 돌아보는 단계인 것 같아요. 앞으로 쓸 때가 오겠죠. 글이 되려면 시차가 조금 필요해요.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묘사한 가발공장 소녀들이나, 첫 시집에 실린 <설탕공장 소녀들의 문자 메시지가 출렁출렁 건너가는 밤>에 나오는 인물은 직접 만난 사람들인가요? =설탕공장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고 가발공장은, 신춘문예에 응모한 무렵 알던 반도체 공장 출신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나왔어요. 신춘문예 당선작은 그날 밤 네 시간 동안 쓴 시예요. 하필 타자기가 고장나 PC방에서 썼죠. 그무렵 사귀던 여자친구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데, 저는 마침 습작한 지 3년째 봄부터 시를 보면 매직아이처럼 뭔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해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글쓰기가 즐거워졌죠. 4학년 올라가서 각종 대학문학상을 많이 타면서 상 타는 글이 어떤 글인지 알아버렸고, 내처 등단까지 한 거예요. 그러니 당선작 역시 테크닉으로 쓴 글이었죠. 진정한 시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첫 시집에도 등단작을 싣지 않았어요. 시상식 끝나자마 인도로 도망쳤다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돌아왔어요.

-저런! = 1년 계획으로 떠났는데, 3개월 만에 사스가 터져 동남아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귀국조치가 취해졌어요. 고향으로 내려가 병중인 어머니를 아침마다 산부인과에 모시고 갔는데 한달쯤 지나니까 웬걸 어머니가 절 부축하고 있는 거예요! (좌중 폭소) 산부인과에서 피 검사를 받은 결과 괴질 진단이 나왔고 바로 어머니와 함께 그 병원에 격리됐어요. 참, 수많은 아이가 태어나는 광경을 보았죠. 40도 가까운 고열에 떠서 지냈는데, 그때 결정적인 경험을 했어요.

-만드는 글이 아니라 진짜 쓰고 싶은 게 뭔지를 깨달은 건가요? =몸으로 깨달은 거죠. 우리는 열을 그냥 온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겪어보면 열이란 시간이며 공간이라는 걸 알게 돼요. 만약 40도로 4시간을 앓았다면 40도짜리 열의 시간이 있고 그것은 몸 안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거죠. <내 워크맨 속 갠지스>라는 시가 그 이야기예요.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열과 바람, 음악, 휘파람에 대해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됐죠.

대필로 돈을 버는 일이 뭐가 부끄러운가

-등단 뒤 4년간 대필작가, 야설, 무협지 작가로 일하셨는데요. 매문의 추억일 뿐인가요? 아니면 결과적으로 글쓰기 훈련이 된 면이 있었습니까? =경험주의를 칭송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떤 글이든 주어진 시간에 써낼 각오가 생겼어요. 대필도 처음에는 남의 삶을 쓰는 일이 두려웠지만 다양한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프리랜서로 살 수 있는 노하우를 습득했어요. 야설은 내 글을 보고 내가 흥분 못하면 타인을 흥분시킬 수 없으니 먼저 자기 검토를 해야 해요. 그런데 남자의 생리구조상 몸이 뻣뻣해져서 모니터를 보면 괴롭죠. (웃음) 원고지로 3만매를 써냈으니 하루에 80매를 쓴 셈이에요. 글 진도가 안 나가는 후배들을 보면 한줄 한줄 나아가다 스스로 지치는 타입인데 저는 일단 통으로 쓰고 퇴고를 아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시를 쓸 때는 두개의 방식이 있어요. 시가 그냥 흘러올 때가 있는가 하면, 철저하게 오랫동안 생각과 코드를 알레고리화시키면서 다듬기를 거듭해요.

-영화사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신생 영화사들에서 3개월, 6개월짜리 일을 전전했어요. 대학 때 민주노동당 활동을 한 인연으로 진보신당으로부터 선거 때도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죠. 사실 원로 문인 중에는 선거 무렵 기조연설문 제작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대필 청탁은 지금도 들어와요. 글쓰기를 배워 그것으로 돈을 버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야설작가도 직업군의 하나인데 왜 숨겨야 할까 스스로 회의를 느끼기도 했어요. 과거 인터뷰에서 대필 풍토에 대해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저자를 밝히려는 뜻이 아니라 ‘유령작가’들이 처한 궁지를 알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말하고 싶어서였어요. 뽑아준 매체에서도 돌보지 않는 ‘신춘고아’들은 주로 야설, 무협지 작가를 하게 돼요. 그들이 관행적으로 겪는 불평등한 조건도 있고 더러는 최초의 순정을 잃고 지쳐 떨어져 자신의 글을 못 쓰는 예도 봤어요. 대필작가 시절, 연예인 경우는 밤무대 뛰는 동안 맥주 한병 앞에 두고 밤새 기다리다가 밴에서 듣고 쓰기도 했어요. 그러고는 이튿날 저녁 전화가 걸려와 어제 쓴 것 읽어달라는 경우도 있었죠.

강력계 형사 아버지에 반항하며 정체성 찾다

-그야말로 빵 굽는 타자기군요. 자전적 산문집 <펄프 키드>를 보면 “타자기로 글 바느질을 배웠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자판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가요? =필력의 시작이 언제냐는 애매한 문제예요. 시를 쓰겠다고는 24, 25살부터 결심했어요. 강력계 형사반장이었던 아버지가 IMF 때 명퇴를 했는데, 유일하게 타자기 하나를 집에 들고 오셨어요. 아버지는 죄의 기록을 평생 타자로 치셨죠. 아버지가 타자기를 잘 두드리면 그 사람은 감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고, 나는 타자기를 잘 치면 내가 꿈꾸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의 정체성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부터 형성됐어요. 평생 누군가를 의심하는 직업 때문에 아버지는 식구들도 의심했고 사랑의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듯 때리기도 했어요. 자연스레 저는 아버지에게 거짓말 잘하는 데에서 삶의 정체성을 찾았고요.

-글을 짓는 버릇이 그때 시작된 걸까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뒷날 변화를 겪었습니까? =동력이 아주 강한 직업이 삶에서 사라질 때 사람이 얼마나 빨리 늙어가는지 몰라요. 명퇴를 하시고 나서 아버지에게 연민을 갖게 됐어요. 아버지는 53살까지 100m를 구두 신고 12초에 주파했고 33년간 한번도 조퇴나 결근을 한 적이 없어요. 술 한잔은 아껴 마시면서도 무협지를 엄청나게 좋아하셔서 제 최초의 독서는 만화와 무협지였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게 하나 있다면 나중에 탐정사무실을 차리겠다는 꿈이에요. 꼭 위험한 일만 있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아이나 고양이를 찾는 일도 할 수 있죠. 사실, 모든 글은 추리의 형식이기도 해요. 전, 매일 삶의 조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 등단을 한 이후에 철학과에 다시 진학했는데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을 낸 배경이 무엇인가요? =처음으로 공부를 진지하게 한 경우였어요. 진짜 글을 쓰려면 사유를 공부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모든 글은 묘사와 진술인데, 시를 움직이는 건 한줄의 진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정말 철학이란 진실로만 이루어진 시다. 세계에 대한 가설에서 시작해 가설로 끝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철학과 시는 같다는 깜냥이 있었죠. 그런데 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깨졌죠. 학문인 철학과 시는 상극이더라고요. (웃음)

기형과 시차에 대한 관심

-김경주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처럼 통상의 시점을 180도 바꾸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근본적으로 제가 관심있는 주제는 기형(奇形)과 시차예요. 시차는 여러 가지 ‘기형’의 한 형태죠. <비정성시>라는 시를 보면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는 구절이 있어요. 제 시의 화자는 죽은 줄 모르고 이승에도 저승에도 머물지 못하며 떠도는 자고, 저는 그가 목소리를 가지면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한 것이죠.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는 건가요? 각각의 자아가 갖고 있는 차이를 시차라고 뭉뚱그려 부르나요? =벽에 박힌 못을 이쪽에서 보면 벽에 박혀 있지만 벽 뒤쪽의 시선으로 보면 시간 속에 떠 있는 것이죠. (말이 빨라진다.) 즉, 기이한 형태예요. 기형은 왜 인간으로 하여금 연민, 아름다움, 서글픔을 느끼게 할까. 그것을 찾는 게 저의 미학이에요. 여행과 공연도 ‘시차’의 연장이죠. 무대에서 배우들은 페르소나 속에서 시차를 겪는 것이고요. 지휘자가 연주를 마쳤을 때, 거대한 울음을 상기시키는 공연장 안의 침묵 또한 시차예요. 제 시의 중요한 코드 중에 휘파람이 있는데요. 어린 시절 대중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신기했어요. 어떻게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사람의 입술에서 가락이 나올까. 언젠가 타이의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취해 휘파람을 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휘파람은 바람이고 호흡이니 문명이 사라진 뒤에도 지상을 흘러다닐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오열할 것 같았어요. 그것이 제가 말하는 시차이고 거기서 비롯된 연민이에요.

-시와 산문 속에서 “~라는 것은 ~라는 것이다”라는 양식의 문장이 유독 눈에 띕니다. 예컨대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을 듣는 일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1> 중)처럼. 정의, 아니면 통상의 정의를 거꾸로 세우는 형식인데요, 시에서는 위험한 문투 아닌가요? =뭘 깨달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 굉장히 위험할 수 있죠. 잠언과 아포리즘은 다들 피하려고 해요. 한데 전 극복해보고 싶었어요. 시에 담아선 안될 형식이 뭐 있겠어요. 형식은 논리학인데 내용은 결코 A는 B다가 아닌 것이죠. 시는 잠언보다는 선언이라고 생각해요.

‘발목’이라는 단어를 열번 발음해 보세요

-두 번째 시집 <기담>은 성공작으로 회자된 첫 시집보다 독해가 훨씬 어렵습니다. 배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첫 시집 속의 서정이나 서사구조를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두 번째 시집은 더욱 의도적으로 독자들을 갈라버렸어요. 사랑받는다는 사실의 위험에 대해 짐승 같은 본능이 있어요.

-서정이 무엇이냐는 건 토론이 필요한 문제지만, 일부러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을 도려내는 것도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열패감일 수도 있는데, 저는 근본적으로 시를 쓰는 자는 소임이 있다고 봐요. 시가 감염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는 거죠. 서정이 지닌 폭력성이 있어요.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서정이 옹호를 받아요. 난해한 것을 꺼리고 온기를 찾죠. 그것이 반성없이 기조로 형성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시는 모든 언어예술의 최전방에 항상 서 있어야 해요. 모국어가 썩지 않게끔 고유성을 찾아내야 해요. 시가 제도화, 평면화되면 그 순간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나라의 문화를 평가할 때 시인이 얼마나 있느냐는 중요한 척도죠.

-2008년 작가, 평론가가 뽑은 좋은 시로 선정된 <무릎의 문양>은 매체에서도 많이 인용됐는데 ‘사모곡’의 정서가 호소한 바도 얼마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세개의 단락 중 세 번째만 어머니 이야기죠. 그보다 그 시에 표현한 것은 인체의 작은 부분에 대한 저의 매혹이에요. 쇄골, 귓불, 손톱, 발목…. 저는 발목이라는 단어의 질감이 너무 좋아요. 우울할 때 발목이라는 단어만 열번 말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오규원 시인이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고 썼죠. 전 억지로 독자를 배반하고 불편하게 하려는 태도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생 시 하나만 붙들고 학자처럼 살았던 희귀한 시인으로서 그분을 존경해요. 그래서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어요. 장례에 가지 않으면 제겐 아직 살아계신 거니까요. 친하고 좋아하는 동시대 시인도 많지만, 존경은 이미 죽었거나 한참 어리거나 극복이 불가능한 시차에 존재하는 시인에게만 가능한 것 같아요.

-시를 읽어보면 고체가 액체로 녹고 다시 비등점을 지나며 기체가 되는 상태 전이(轉移)의 모티브가 빈번히 등장해요. 바람이 숨이 되고, 휘파람이 되고, 다시 언어로 화하는 이미지도 많고요. 모든 시가 한편의 기나긴 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한편의 시를 남기는 거죠. 많은 시인을 사람들이 단 한편으로 기억하잖아요. 모든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한편의 시를 향해 쓰는 거죠. 전이의 모티브를 좋아하는 까닭은 타자에게 폭력적이지 않으면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현상이라서예요. 전이가 또한 시차고요. 제 시가 음악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음악 자체보다 저에겐 음악이 지닌 속성이 중요해요. 음악은 경계가 없고 글 모르는 자의 가슴도 파고들어요. 인종도 상관없고요. 그런 지점에서 예술이 종교보다 자유롭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집 <기담>은 동명 영화 개봉 뒤에 나왔습니다. 일반 명사지만 영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어요. =영향도 받았어요. <다섯 개의 물체 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시간>에 보면 ‘눈 내리는 워터볼 만들기’라고 구(球) 모양으로 편집한 페이지가 있죠. 눈 내리는 수정구는 영화 <기담>에 나온 소품의 오마주예요. 영화미술이 표현한 시적 질감이 좋았어요. 사실 그 공이 갖고 싶어 주변에 조르기도 했는데 실패하고 대신 지인들로부터 온갖 스노 글로브를 선물받았죠.

-이사를 자주 다녀 반지하와 옥탑방의 장단점이 환하겠습니다. 지금은 독신자 임대아파트에 살고 계시다고요. =옥탑방이 더 좋아요. 갈수록 빛이 드는 방을 찾게 돼요. 여행 중 숙소를 잡을 때도 다른 비용을 아끼고 발품을 팔아서라도 기를 쓰고 창문과 욕조가 있는 방을 찾아요. 욕조를 너무 좋아해서 옥탑방 살 때도 이동식 욕조를 샀어요. 지금 사는 집에 입주하고는 한동안 욕조에서 나오지 않았죠. (웃음) 나이 들면 욕조 가게를 차리고 싶어요. 손님들이 옷을 고르듯 자기에게 꼭 맞는 욕조를 찾을 수 있도록 음악도 틀어주고 들어가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간 밤>이라는 시는 월세방을 이사 다니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남 이야기 같지 않은 시였습니다. (웃음) =이사할 때마다 방에 남은 전에 살던 사람의 손톱과 머리칼 보는 것이 스산했거든요. 머리칼과 손톱의 이미지를 좋아하는데 나와 함께 있다가 흘러가버리는 것들이라 그렇겠죠. 어제 포털에 연애시를 하나 올렸는데 <내 머리칼 속에 잠든 물결>이라는 시예요. 연인이 누워 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이야기죠. 눈을 감고 조용한 공간에서 자기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보세요. 파도 소리가 나요. 정말이에요.

독자들에게 시는 ‘감(感)의 세계’

-김경주 시인은 극작, 공연을 통해 장르 경계 넘나들기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구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시의 양식이 갖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라든가. 무엇보다 시는 읽고 다시 곱씹으며 즐기는 예가 많은데 무대에서 제시될 경우 독해 속도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궁금해요. 수용자와 만나는 길은 넓어진다 해도 양식을 갈아입어 훼손되는 것도 적지 않을 텐데요. =물론 시의 고유성이 존재하죠. 하지만 그걸 추구하는 분들은 많잖아요. 시적인 느낌이 시 밖으로 빠져나와서도 고유성을 지키도록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 그리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를 틈이 벽에 균열을 내잖아요? 사람들은 예술의 희열을 원래 찾았던 지점에서 얻을 수도 있지만 저도 모르게 젖어들 수도 있어요. 그 틈을 찾는 것이 제겐 중요한 의미예요.

-과거 독자들은 시를 편지에 베껴 쓰고 암송했어요. 최근 독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시를 소비하고 시에서 무엇을 구한다고 보세요? =감(感)의 세계죠. 감을 보고, 감 잡고, 감이 좋으면 한번 더 읽고, 이해했다고 여겨요. 과거 베껴 쓰는 행위는 시와 동일화하는 행위죠. 지금 시는 마니아 문화예요. 읽으면서 이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는 거예요.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건 소설이나 영화가 하고 있죠.

-신형철 평론가가 김경주 시인의 시가 대중에게 소구하는 힘을 투쟁 의지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동의합니까? =작가의 자연이 언어라고 할 때, 시를 쓰는 건 언어의 질서를 발명하고 파괴하는 면이 있으니 그런 맥락에서 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체 게바라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이죠. 저는 지금까지는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이 발언하지 않았어요. 아직은 저널리스트적 미학을 추구할 단계가 아닌 것 같아요. 어느 지점까지는 아름다운 것들만 죽도록 아름답다고 말해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그걸 충분히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세계의 불합리함에 대해 말할 수 있겠죠.

-아들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부모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같은 제 시는 아주 사실적으로 썼어요. 모던하게 썼다면 어머니가 읽을 수 없으니까요. 어머니에게 바친 시집인데 단 한편이라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웃음) 시집에서도 그 시는 세로쓰기 성경 형식으로 편집했는데 이유는 하나예요. 집에 불이 나면 그 페이지만 뜯어서 나가야겠는데 그때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요. 사실 비극이죠. 어머니도 “날 위해 썼다는데 읽을 수 있는 시가 하나도 없다”며 던져버리시고, 아버지는 “날 위해 썼다더니 <아버지의 귀두>가 뭐냐”고 하시고. (폭소) 평생 부모를 향해 글을 쓰는데, 단 한편도 부모님이 해독할 수 없는 시를 쓰다니 예술가의 모순이고 비애죠.

죽은 손목시계를 차고 여행하는 이유

-여행기 <패스포트>와 <레인보우 동경>은 여행 서적 코너에 꽂혀야 하나 망설여지는 책이에요. 생각과 시상을 기록한 수첩에 가깝거든요. 실제로 현지에서 쓰는 여행기의 분량은 얼마나 됩니까? =거의 한줄도 안 써요. 여행 중에는 희곡, 시나리오처럼 여행과 무관한 글을 써요. 역시 글쓰기에 시차가 필요해서죠. 너무 가까우면 의심스러워요. 정보 위주 여행기가 무척 많은데 저는 근본적으로 모든 여행이 무엇인지 묻는 책을 내고 싶어요. 올해는 지중해 편 <패스포트2>가 나와요. 좌석도 없는 배 삼등칸에 타고 그리스 섬들을 돌아다녔어요. 시집은 평생 내지 못하더라도 <패스포트>는 한권에 두 지역씩 죽을 때까지 연작을 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항상 죽은 손목시계를 차고 여행한다고 책에 썼습니다. ‘츄리닝 바람’ 작업실의 벽시계도 멈춰 있던데요. 아예 시계를 차지 않는 쪽이 아니라 죽은 시계를 굳이 차고 가는 까닭이 뭔가요? =시계를 차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시간에 맞춰서 살게 돼요. 그 속도감을 없애고 싶었어요. 죽은 시계는 계속 뭔가를 환기하고 갈등을 일으키죠. 갑갑해서 가끔은 맞추고도 싶고, 몰래 돌려보기도 하겠죠. 죽은 시계는 문학의 이미지예요. 비유하면 시계를 아예 차지 않고 가는 것은 예술이 뭔지는 알지만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고, 죽은 시계를 구태여 차고 여행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환기하고 갈등하며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追伸 김경주 시인은 한때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다. 첫째를 입양한 건, 주변 친구들과도 절연하고 2년 가까이 혼자 시만 쓰던 때였다. 비가 거세게 내려 심히 외로웠던 날, 그는 경기도 시흥의 유기동물 보호소를 찾아가 고양이를 업어왔다. 집 안에 고양이를 내려놓고 그가 던진 첫마디는 “나 아직 잘 살고 있는 거지, 물론?”이었다. 그 대답을 항상 듣고 싶었던 시인 탓에 고양이의 이름은 물론이가 되었다. 둘째 고양이는 길거리에서 그에게 왔다. 사는 게 고달파선지 시든 풀처럼 여리여리했던 암고양이를 시인은 ‘문란’이라고 불렀다. 글월 문(文)에 난초 난(蘭). 문체 안에 난초가 핀다는 의미도 두었다. 지금은 두 마리 다 그의 곁을 떠났다. 새벽 네시, 후드를 눌러쓰고 지하 작업실의 이층침대로 돌아가는 김경주와 헤어지며, “물론”이라고 자문자답하며 싸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양이에게 꽃의 이름을 붙여주는 시인은, 내일도 밤새 짐승처럼 어슬렁거리며 시를 쓰다가 새벽녘에야 식물의 고요한 날숨을 토하며 쪽잠을 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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