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 전에 아주 잠깐 졸았다. 잠깐 동안이었는데 꿈을 꿨고, 꿈속에서 정지한 버스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낭떠러지가 보이는데 떨어질 듯 말 듯, 그제야 안다. 페달을 누르는 사이 조금이라도 뒤로 갈까봐 액셀을 밟지 못하고 있는 운전사의 고뇌를.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난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낭떠러지가 너무 무섭다. 혹시나 상황이 바뀌었나? 기대하며 눈떠보지만 버스는 여전히 멈춰 있고, 공포에 질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건 꿈일 거야’ 다시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자, 이번엔 힘을 주어 눈을 뜬다. 눈뜨자 보이는 나의 오른팔, 안도하는 나는 정말 꿈꾸었구나!
‘고뇌하는 영웅담’이라는 최신 트렌드
꿈이건 환상이건 생각의 환영이 주는 교훈이 있다. 아마 슈타펜버그 대령이라면 어땠을까? 혹은 같은 상황에 처한 울버린이었다면? 전자의 경우는 아마 운전사를 안정시키고 페달을 밟게 해 상황을 모면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정부에 요구해 도로변 가이드 레일을 설치하겠지. 그렇다면 울버린은? 그는 갈팡질팡하는 운전사가 운전을 하도록 내버려둘 캐릭터가 아니다.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안전한 곳까지 차를 옮긴 뒤, 차에서 내려 사라질 것이다. 뒤에 남겨진 승객에 그는 관여하지 않는다. 아, 한명이 더 있지. 큰 키의 클라크 켄트, 그의 경우는 간단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버스 천장을 들어올린다. 모두를 구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2009년을 지나며 여신 ‘발키리’의 이름은 이제, 게임 속 캐릭터의 모습보다는 톰 크루즈의 얼굴을 통해 떠오를 것 같다. <작전명 발키리>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엑스맨, 슈퍼맨에 이은 또 다른 영웅의 모습을 선보이는데 그의 이름이 ‘슈타펜버그’다. 이제 보니 포스터 속 톰 크루즈 표정이 마치 시대의 구원자 같다. 그렇다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 그가 전하고자 한 것은 역시나 역사적 고발이었을까? 아니면 감동의 서사극? 둘 다 정확한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 재현과 실화의 감동을 뛰어넘는 일관성 하나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데, 슈퍼히어로도 아니지만 고뇌하는 영웅도 아닌 이른바 새로운 영웅론의 대두가 그것이다.
지난해까지 쏟아진 각종 영웅 영화의 리스트는 결국 현실적 영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정리되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작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히어로물의 외적 플롯을 내적 플롯으로 변환시켰는데, 이를 통해 ‘고뇌하는 영웅담’은 가장 최신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현재는 제임스 본드마저 제이슨 본마냥 고뇌 중이고, 그런 그의 고뇌가 오히려 세련돼 보인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일단 우리가 발키리의 영웅 슈타펜버그에 다가가기 위해선 이 영웅담의 진화를 살필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필모그래피는 몇몇 영웅적 캐릭터의 변화를 꾸준히 선보이는데, 하지만 엄격히 말해 <엑스맨> 1, 2를 영웅물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영화는 오히려 판타지가 가미된 홀로코스트물에 가까운데, 영화 속 변종집단은 사회정의가 아닌 자신들의 존재권을 위해 투쟁하고 이 과정에서 울버린은 오히려 성인판 해리 포터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수퍼맨 리턴즈>에 이르러 화제는 변한다. 판타지가 영웅물과 각을 달리하는 것처럼 일반 서사영웅극과 슈퍼히어로물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경각심이 이 작품의 근저에 깔려 있다. 이는 싱어가 이 영화를 전형적 슈퍼히어로물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텐데,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배트맨이 그랬듯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은 초인간적 능력을 기반으로 마치 신화 속 주인공인 양 행동한다. 그는 인간 세계에 살면서 신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관객은 그를 통해 대리만족이 아닌 일종의 스펙터클을 경험한다. <수퍼맨 리턴즈>의 슈퍼맨은 이런 웰메이드 상업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선택하지 않는 인간은 1단계?
반면 ‘슈타펜버그’ 캐릭터는 복합적이다. 아니 어쩌면 단순화되었다 말해도 좋다. 그는 상당히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지만, 그 복합성은 분석 가능하기에 오히려 단순하다. 그의 얼굴은 일단 ‘발키리’의 이름으로 각인되는 신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플롯 속 캐릭터는 신이 아닌 인간적 영웅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가 제임스 본드처럼 구는가? 아니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는 데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데- 이 영화에서 내적 플롯을 찾기란 어렵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에 필사적인 이유가 드러나는 것은 초반의 전투신이 전부다.
대신 감독은 그를 전혀 다른 권한의 영역으로 몰아붙이는데, 바로 ‘선택’의 특권에 대한 영역이다. 싱어 감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양자택일의 갈래에 세우는데, 작전을 실행할지 아닐지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도 그이고, 또 작전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선택하는 것도 그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슈타펜버그 이외의 인물은 선택의 순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우물쭈물하는데 이 법칙에 예외는 없다. 막상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자 점심을 먹으러 가는 올브리히트, 늑대굴의 통신을 담당하는 에리히 장군은 작전에 가담할 때 그랬듯 포기할 때 역시 우유부단하다. 통신부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인데, 그곳의 우두머리는 상반된 두개의 명령서를 결국 모두 상부에 전달해버린다. 그 권한을 떠넘기며 그는 언젠가 누군가는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선택을 하는 인물은 오직 한 사람 ‘슈타펜버그’뿐이고, 영화 보는 내내 머릿속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란 문구가 떠다닌다. 질 들뢰즈에 따르면 양자택일(alternative)은 일종의 정신적 선택이다. ‘언제나 모든 문제에 예외는 있다’는 일반론이 팽배한 현실에서 양자택일은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되기 쉽지만, 이른바 좀더 고차원적인 상태를 드러내기에 평가절하되어선 안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키르케고르의 개념을 빌리는데,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생은 3단계로 나뉜다. 1단계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일종의 향락적 심미의 상태라면 2단계는 무절제한 절망을 한탄하는 ‘도덕적 경지’를 이른다(3단계 ‘종교적 단계’는 여기서 필요없다).
이렇게 선택의 문제는 2단계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윤리문제’로 치환되는데 정신적 양자택일은 이 전부를 포괄하는, 즉 적어도 2단계에 이른 자를 위한 개념이다. 이 부분이 재밌다. 이른바 도덕적 필연성 혹은 심리적 필연성을 기반한 정신적 양자택일은 ‘선택과 비선택’마저 선택하게 만드는 넓은 개념인데, 이는 ‘선택’을 하는 인간이 ‘비선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을 것이란 점을 상정하기에- 대립항이 모호한 상태에서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선택하지 않는 인간은 1단계에 머무른 상태다- 어떤 이가 양자택일의 순간에 이르렀다면 이미 그는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인간이라 칭할 수 있으며, 슈타펜버그 캐릭터가 그렇다(들뢰즈는 이외에도 더 세분화된 영화 속 양자택일의 케이스를 구분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슈타펜버그는 양자택일을 통해 영웅의 단계에 돌입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즉, 그는 포지션이 아닌 선택의 힘으로 권력의 핵심에 다가간다.
가족의 생존, 공정한 해피엔딩
이러한 논리는 우리가 숨겨진 영화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바로 주인공이 선택하지 않은 ‘비선택’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론이 그것인데,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관객의 인지를 유도했다(이것이 아주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가 의도했음은 분명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슈타펜버그 대령은 히틀러 암살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독일이 구원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의 ‘기회비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가족의 안녕’이다.
알다시피 <작전명 발키리>는 주인공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따라서 감독은 부분의 서스펜스에 집중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결코 결론에 방만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웅 슈타펜버그의 이야기는 내부적 측면에서 오히려 성공했다고 보는 편이 옳은데, 외적 미션이 실패했음에도 그는 결국 양자택일의 기회비용을 보상받기 때문이다. 즉, 과정이 어찌되었건 독일은 마지막 자존심을 회복했고 그의 가족은 살아남는다.
역사의 시간은 주인공이 방만했던 비선택의 회한을 갚아 그의 실패에 보답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대령이 가족과의 통화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설계했는데, 따라서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그의 가족 모두가 생존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자막에서 관객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물론 이 순간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 슈타펜버그가 100% 실패한 것은 아님이 밝혀지면서 여전히 살아남은 선택의 대립지점은 꽤 공정한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러니 이 영화를 당연한 결과의 서스펜스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지엽적이다.
슈타펜버그가 맞은 상황은 히틀러라는 거대 괴물과 맞서는 사회 정의에 해당하지만, 그가 영웅으로 일어서는 모습이 부각된 것은 내면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이런 텍스트는 사건이 축소되면서 점점 일상적인 사건들로 치환될 수 있다. 이른바 일상적 영웅에 대한 영화일 텐데,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연작이 대표적 예다. 이 시리즈물의 주인공들은 각자 스스로의 방식으로 신의 결정을 거스르는 인물들이다. 비록 키에슬로프스키의 신이 그들의 선택을 모두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선택하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일상을 살펴볼 때 그들은 지극히 영웅적이다. 일상적 영웅의 탄생, 좀더 세분화되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지현 한양대 영화과 졸업 뒤 프랑스 캉(Caen)대학에서 들뢰즈 시네마를 공부했다. 현장에서 일하며 이따금 글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