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시즌이다. 가뜩이나 취업난으로 시달리는 대학생들에게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시기다. 더구나 영화산업의 침체로 제작편수가 예년에 비해 반수 이상 줄어든 탓에 요즘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은 한숨을 내쉰다. 보통 연극영화과의 졸업 뒤 진로가 크게 현장 진출과 대학원 과정으로 나뉘는 것을 감안하면 제작편수의 감소는 이들에게 치명적이다. 게다가 요즘은 제작에 들어가는 현장도 신입보다 경력을 우대한다. 연극영화과만 나오면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현장의 막내도 되기 힘든 상황이다.
전국 100여곳에서 2만여명 쏟아져나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 인근의 한 대학 연극영화과 졸업예정자인 신선의씨의 푸념이다. 그녀는 한국영화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던 2005년에 입학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 흥행작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고, 자신도 그에 못지않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현장은 아득히 먼 곳이다. “제작편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그나마 제작에 들어가는 곳도 ‘상업영화 1편 이상’의 경력자들만 구하더라.”
실제로 최근 현장에선 경력이 한편도 없는 ‘진짜 막내’가 사라지고 있다. 올해 개봉예정인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연출부는 전부 조감독 경력을 가진 인력으로 구성됐다. 제작사인 싸이더스FnH의 한 관계자는 “요즘은 쉬는 경력자들이 많아서 굳이 신입을 뽑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촬영부나 조명부와 같은 기술스탭은 전공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선호하는 도제 시스템인 경우가 많고, 연극영화과 출신을 뽑더라도 대체로 학교 후배들인 경우가 대다수다. 게다가 요즘은 다른 팀과 품앗이(퍼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을 서로 빌려주는 방식)를 하기 때문에 막내를 따로 충원하지 않는다. 신선의씨는 “선배 세대들은 도제 시스템의 막내로 들어갈 기회가 많이 주어진 반면, 우리 세대는 현장에 들어갈 통로조차 막혀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전국의 연극영화과는 10여개 남짓이었다. 이후 1998년 <쉬리>의 등장 이후 한국영화의 질적, 양적인 성장에 힘입어 각 대학에선 영화·영상 관련 학과들의 신설이 붐을 이뤘다. 올해 <씨네21 2009전국영화영상학과 입시가이드>에 따르면 현재 영화·영상 관련 학과 수와 입학정원은 100여개 학과, 2만여명에 이른다. 한해에 2만명을 뽑는다면 매년 그 정도의 졸업자가 학교 밖으로 쏟아진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연극영화과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취업풍경이 펼쳐진다. 이른바 88만원 세대 연극영화과 신(新)취업풍속도다.
단국대 공연영상학부 영화전공 4학년 휴학생인 양기원씨는 최근 CJ 대학생 인턴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선배들과는 달리 나는 ‘오로지 영화만’은 아니다. 평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방송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는 조원들과 함께 일주일에 2∼3번의 모임을 가지며 조별과제를 수행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국내 방송프로그램의 트렌드를 예측하고, 아이템을 함께 개발한다. 집에 들어오면 토익공부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인턴이 없는 날에는 집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영락없는 (연극영화과가 아닌) 일반학과 취업준비생의 모습이다.
“예전에 연극영화과의 진로는 단순했다. 현장으로 나가거나 대학원에 가서 좀더 공부를 했다. 혹은 영화전문교육기관인 한국영화아카데미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 가서 세부전공(기획, 연출, 촬영, 녹음)을 심화한다. 나는 배운 것들을 다른 일에 활용하고 싶다.” 그는 “연영과 학생이라고 해서 (일반기업의 일을)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면서 “영화만 고집할 게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눈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수능시험 다시 치거나 행정고시 준비도
2000년부터 전국의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전공과목 교직이수 제도에 눈을 돌리는 학생들도 늘었다. 총 20학점의 교직이수 자격요건을 채운 신선의씨도 오는 3월에 교생실습만 다녀오면 영상학과나 수업이 있는 중·고등학교의 특별활동 강사가 될 수 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경기도 동두천시 한국문화영상고등학교의 강사가 된 우보연씨는 교직이수를 미래를 위한 기회라고 여긴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 현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꿈을 계속 키울 수 있다. 오히려 생활을 현실적으로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친구들보다 여유가 있다.” 그는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제작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장편 시나리오를 쓴다. 이전에는 미래를 위해 일단 들어놓고 보는 보험 성격이 강했던 교직이수가 이제는 또 다른 진로로 자리잡은 셈이다.
연극영화과를 떠나거나 아예 전공과 무관한 진로를 선택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잘나가는 연극영화과 빅3(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중 한 군데를 다녔다’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졸업생 A씨는 수능시험을 다시 쳐서 새로운 학교에 재입학했다. 그는 “현장이 그 많은 학생들을 다 받아줄 수 없고, 전공을 다른 분야에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점 때문에 연극영화과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암울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학과 행사에서 졸업한 선배들을 만나면 다들 마땅히 하는 일 없이 ‘시나리오 작업 중’, ‘입봉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지난해 2월 서울 시내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B씨도 비슷한 이유로 행정고시를 준비한다.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 막막했다. 연출부를 지원하기 위해 모집하는 곳마다 이력서를 넣었는데 다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업의 공채 모집전형에 ‘연극영화’ 전공은 해당사항이 없어서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학과제한이 없는 행정고시였다.”
한국영화계 거품의 또다른 풍경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일단 영화산업의 위축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만, 애초에 산업의 크기에 맞지 않는 무분별한 연극영화과 신설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 관계자는 “대학쪽이 ‘전공의 한면’만 보고 ‘필요 이상’의 학과를 신설한 데다, 장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으로 지원한 학생들이 대다수인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물론 대학이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령 동아방송예술대학 영화예술과는 러시아 국립영화학교, 미국 시카고예술대학, 베이징 전매학원 등과 자매결연을 맺어 학사 혜택을 제공한다.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도 지역방송국, MBC, 올리브나인 등과 산학협력을 맺어 학생들을 실전에 바로 투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내놓은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적지않다.
연극영화과만 나오면 영화판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시대는 갔다. 전국의 연극영화과는 매년 필요 이상의 인력들을 토해내지만, 정작 영화계는 필요한 만큼의 인력보다는 당장의 효율적인 인력구성을 원하고 있다.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의 한숨은 한국영화계의 거품이 낳은 또 다른 풍경일지 모른다. 거품을 거둬내려 안간힘을 쓰는 영화계의 움직임을 영화학계 또한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