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시점이 참 절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체인질링> 이야기다. 설 연휴기간 동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어린이 납치를 다룬 영화가 그러하듯,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의 악착같은 모성이 정당한 건 말하나 마나다. 그녀에게 가짜 아이를 안겨준 뒤 진짜라고 우기고, 결국 정신병원에까지 감금하는 LA 경찰의 행태가 이치에 어긋나기도 마찬가지다. 선량한 시민과 불량한 경찰의 싸움을 보자니 퍼뜩 용산이 떠올랐는데, 그걸 정색하고 이 지면에 옮기는 일이 왠지 민망하다. ‘인터넷엔 벌써 <체인질링>을 용산 참사와 비교하는 글들이 꽤 떠 있겠지?’ 극장을 나서기도 전에 그렇게 예견했던 터였다.
예상대로였다. 포털 검색창에 ‘체인질링 & 용산’을 치자 수많은 글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 그 두개의 사안은 명쾌하게 유사한지 의심하고 싶어졌다. 영화 속 여인의 투쟁엔 불온한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경찰에 따르면) 철거민들의 폭력투쟁엔 보상금을 높이려는 불온한 의도가 스며 있지 않았나. 맞다. 철거민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적지 않은 대중이 거기에 동의한다(고 경찰은 주장한다). 철거민들의 에이전시로, 매니저로 싸운 전철연을 봐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대한민국 최후의 도시 무장게릴라들처럼 보인다. 덕분에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아직 영화 속 LA 경찰청장 데이비스 꼴이 나지 않았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너무 쉬운 질문을 던진 걸까).
내가 정작 헷갈린 대목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영화 후반에는 어린이들을 양계장으로 납치하여 도끼로 찍어 죽이는 고든 노스콧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영화를 본 날 마침 경기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의 용의자 강호순씨가 현장검증을 했다. 1928년 LA의 노스콧은 잘생긴 맨 얼굴로 기자들 앞에 서고 법정에 출두했다. 2009년 군포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모자를 눌러썼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2009년 LA에서는? 내가 아는 한, 중대한 범죄의 경우 얼굴과 실명이 매스컴에 공개된다. 미국에선 시민들의 알 권리를, 한국에선 피의자의 인권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쪽이 맞는 걸까. 영화는 교수형에 처해지는 노스콧을 담담히 보여준다. 강호순씨가 비슷한 처지에 놓일지 모르겠지만 사형제에 관해선 반대운동쪽을 지지한다. 그러나 솔직히 마스크에 관해선 판단이 안 선다. 아, 한 가지는 확실하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정 못 물러나겠다면 마스크라도 씌우기를! 그 마스크는 벗기기 싫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