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의 여왕 나도 가끔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불끈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면 이번 골든글로브. 히스 레저의 수상은 모두가 ‘예’였지만 나는 홀로 되뇌었다. ‘아니오, 톰 크루즈요.’
톰 크루즈라고? <탑건> 이후 톰 크루즈가 조연이었던 적이 있나? 반문한다면 당신은 2008년의 위대한 걸작 <트로픽 썬더>를 놓친 거다.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 개봉까지 했는데- 케이블에서는 나름 광고도 많이 했다- 소홀히 여긴 댁들 복이지 뭐.
오로지 잭 블랙과 조우하러 간 이 영화에서 나는 맡고야 말았다. 20년 전에도 스타였고, 10년 전에도 스타였고, 죽을 때까지 슈퍼히어로일 것만 같아서 이름만 들어도 졸음이 쏟아지는 그 이름, 톰 크루즈의 아저씨적 진한 향취를.
이 영화에는 개진상 아저씨의 이데아가 등장한다. 영화제작자 레스 그로스맨. 누가 모델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리 브룩하이머급의 막강한 권력자인 그는 화상회의 때 처음 등장하는데 촬영현장과 떨어져 직접 할 수 없으니 스탭을 시켜 일단 감독의 쌍코피부터 터뜨린다. 그리고 시작하는 말에는 f 발음이 떨어지질 않고 “니 거시기를 똥구멍에 넣어주겠어”라는 고함은 애교 수준. 게다가 대머리에 기름진 몸매, 두꺼운 금목걸이에 인간인지 오랑우탄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수북한 털은 브리태니커 사전에나 존재할 법한 꼰대의 현현이다. 출연정보를 몰랐던 나는 그저 보는 이로 하여금 때려죽이고 싶게 만드는 그 놀라운 연기력에 감탄하다 나중에 비로소 그인 줄 알고 한번 더 놀랐다. 오빠 좀 짱이잖아!
지루한 줄 알았는데 발랄하고, 무딘 줄 알았는데 소심하며, 올드한 줄 알았는데 귀여운 아저씨가 트렌디한 즐거움을 준다면 역시 정통 아저씨의 맛은 역시 이런 꼰대가 아닌가. 세상의 모든 아저씨들이 천진한 소년임을 주장하는 이 시점에 그로스맨처럼 70년대 빈티지 스타일- 탐욕, 협잡, 음모, 배신 등이 아로새겨진- 의 마초야말로 우리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톱스타의 인질극을 앞에 두고서 심각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책상 밑에서 <맥심>을 쓱 꺼내고는 매니저를 돈으로 이간질하는 중년의 카리스마야말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아저씨의 관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 물론 캐릭터로만.
하지만 이 아저씨가 진정 매력적인 건 톰 크루즈가 연기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망가져서? 아니지. 자기가 자기 연기를 저렇게 잘하는 데 누가 그 모습에 탄복하지 않겠나. 할리우드의 큰손인 톰 크루즈야말로 아이돌 스타의 탈을 쓴 레스 그로스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가 <플레이어>처럼 진지하게 할리우드의 추악한 본성을 까발리는 영화에서 탐욕스러운 제작자 역할을 했다면 지루하거나 불쾌했을 것 같다. 관객이 이미 <매그놀리아>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나 연기도 잘하는 스타야’ 메시지를 동어반복하며 ‘내 이야기는 아니거든’ 내빼는 알리바이로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트로픽 썬더>에서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기로 자처했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건 신랄한 자기비판보다 한 단계 더 까다로운 일이다. 이 고난이도의 유머를 즐길 줄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진짜 멋진 아저씨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