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기자로 뛰던 90년대 중후반, 서울은 온통 재개발 재건축 난리부르스였다. 철거 세입자들의 망루며 천막을 취재 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선과 악의 대결이 선명했다. 멀쩡히 사람이 자고 있는 안방 창문을 굴착기가 뚫고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다. 철거 현장은 온통 세입자와 용역깡패, 그리고 기계들의 대리전이었다. 건설사와 구청, 조합(땅주인) 관계자는 얼씬도 안 했다. 경찰은 사람이 죽고 다쳐야만 코빼기를 비췄다. 난민도 아니고 철거민이라는 말은, 재벌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만의 고유명사일 것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법과 행정은 여전히 무작동이고, 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가진 자 편에 섰고, 사람들은 농성하는 철거민들에게 돈 몇푼 더 받으려고 저런다며 쉽게 딱지를 붙인다. 막대한 개발이익과 세입자에게 쥐어지는 이주비의 차이만 더 벌어졌다.
적준이라는 전설적인 이름의 용역업체 깡패들과 드잡이를 해도 철거 취재에 이골이 나서 눈 하나 깜빡 안 했지만(르포를 쓰느라 붙박이로 지낼 때 애들 방에 웃통 벗고 들어와 눕는 깡패에게 “왜 자지는 작아서 빤스는 못 벗냐”고 일갈할 정도였지만) 간혹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때가 있었다. 철거촌 부엌 수챗구멍에 밥풀 몇 개가 엉겨 있는 모습을 볼 때였다. 그래도 끼니때면 밥은 끓여먹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종종, 아니 늘 눈물이 났다. 동대문구 이문동, 성북구 길음동, 성동구 금호동, 용산구 도원동…. 지금은 높디높은 아파트나 주상복합이 세워져 있는 그곳은 소리없는 전쟁터였다. 살인적인 철거가 이뤄진 곳에서 결코 살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수도권의 이 아파트도 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것일지 모른다.
집테크가 재테트인 시대를 지나, 이제는 직테크(직장에 안 잘리고 다니기)가 재테크가 됐다. 용산 재개발 조합원들은 개발 결정만으로 평균 5억4천여만원의 이익이 생기고 개발이 완료되면 부동산값 상승으로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는데, 세들었던 상인들은 평균 2500만원의 휴업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자영업자에게 권리금은커녕 인테리어 비용에도 못 미치는 돈을 주고 장사를 접으라는 것은, 직장인에게 몇년치 월급을 도로 뱉어놓고 회사를 나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만약 용산의 그 세입자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십수년 전 철거 현장에서는 공권력의 실종을 규탄했는데, 2009년 벽두에 공권력에 의한 학살을 보았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