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등을 본다. 까만 티셔츠를 걸친 그의 등을 본다. 그는 우리 가까이 있는가 하면 때론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듯도 하다. 하지만 멀어지는 것은 그가 아니다. 그의 스쿠터는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아니 따라잡으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결국 머뭇거리는 우리 자신이 문제인 셈이다. 그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상상적 공간의 거리는 어느새 감독의 ‘의도’를 떠나 주저하는 우리의 태도, 혹은 비겁함이 유발하는 심리적 거리에 대한 표상이 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기어이 그 자리로 데려가고야 만다. 이것은 영화광의 오마주도, 끔찍하게 죽어간 거장에 대한 우수어린 회고도 아니다. 어느새 현실과의 끈을 놓쳐버린 이미지들에 대한 분노, 살해당한 이미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다. 아쉬운 것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이 분노와 안타까움을 실어다 줄 매개로서의 이름, 파졸리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대신 다른 이름을 가져다 두고 상상에 잠길 수도 있다.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에는 이처럼 내러티브의 논리적 전개를 떠나 있으면서도 그 강렬함으로 인해 우리를 감동시키는 순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결정화된 순간들. 이러한 순간들 가운데 앞에서 예로 든 ‘스쿠터를 타고’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나를 감동시킨다.
올해 초 스카라극장에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마태복음>이 상영된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영화관을 찾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나는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단체와 관련된 한 신문사의 이벤트 덕분이었고, 그날 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이 이벤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신도들이었다. 운 좋게 영화를 보고 온 후배를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영화 상영 전에는 관객이 다함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도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 먼 거리를 건너온 이 기이한 성서영화가 참으로 기이하게 수용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졸리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고 다시 <나의 즐거운 일기>로 돌아와보자. 감독이자 영화 속의 주인공인 난니 모레티는 휴가철의 텅 빈 로마시를 그의 스쿠터 베스파를 타고 유유히 가로지른다(에피소드 1부: ‘스쿠터를 타고’).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결코 관광지로서의 로마가 아니다. 난니 모레티의 로마에는 관광지로서의 로마가 보여주던 익숙한 풍경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모레티가 사랑하는 많은 평범한 건물들과 골목들, 도로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휘황찬란한 외양이 보여주는 허울을 벗겨버리는 대신 거기에 자신의 내밀한 욕망과 기억을 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난니 모레티는 집요한, 이미지의 탐색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탐색은 철저하게 모레티 자신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 바로 보고 싶어하는 욕망, 혹은 욕망의 시선이다. 그가 간혹 움직임을 멈추는 것은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플래쉬 댄스>에 출연한 할리우드 배우 제니퍼 빌즈(와 그녀의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알렉산더 록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혹은 거리에서 춤추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그들의 춤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건물 안을 들여다보거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50년대에 제빵업자로 일한 트로츠키주의자에 관한 뮤지컬영화를 위한 장소물색중이라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 자신이 살고 싶은 고층건물을 여자친구와 함께 올려다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를 보고 웃는 것은 이러한 욕망을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드러난 행위의 어처구니없는 특성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제니퍼 빌즈 앞에서 수다를 떠는 것이나 ‘섬들’ 에피소드에서 실비나 망가노 주연의 영화를 보고 춤을 따라하는 모습은 제니퍼 빌즈의 말마따나 정말 ‘괴짜처럼’(whimsical) 보인다.
그가 영화 속에서 작은 스쿠터를 타고 이동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도시를 빠르게 가로질러 가는 자동차의 유리창 너머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오늘날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이미지들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모레티가 스쿠터 위에 올라탐으로써 우리는 그를 지켜봄과 동시에 그가 관찰하는 대상들을 좀더 여유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나의 즐거운 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날의 영화적 이미지들이 지니는 속도에 대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혹은 여기에서 도시는 영화의 메타포이다.
의지, 이미지의 틈새를 뚫고가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롱테이크장면에서 모레티는 수다떨기를 그친다. 이제 우리의 목소리로 그 여백을 채워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 우리에겐 그러한 목소리를 끌어낼 동인이 될 기억이 없다. 실패한 혁명세대의 회고조 영화, 그리고 <헨리 : 연쇄 살인범의 초상>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파졸리니에 대한 기억에 다다른 모레티는 두 번째 에피소드 ‘섬들’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미디어 비판에 나선다. 누가 보더라도 이 에피소드의 의미는 명백하다. 오랫동안 텔레비전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율리시즈> 연구자가, 어쩌다 보게 된 미국 연속극에 빠져 단 며칠 사이에 지독한 텔레비전 중독에 걸리고 만다는 이야기. 거기에 엔니오 모리코네와 비토리오 스토라로를 기용하여 자신의 섬을 홍보하겠다는 스트롬볼리 시장의 존재까지 가세하고 보면 이 에피소드의 의미는 더더욱 명백해지는 것 같다.
사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형식적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아주 유사하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주인공의 행보는 섬과 섬을 옮겨다니는 것으로 대치되고 오토바이라는 이동수단은 배와 스트롬볼리 시장의 삼륜차 등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이야기의 단선적 진행을 방해하는 자잘한 사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모레티가 두 번째 에피소드의 명백한 의미를 피해나가면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역시 너무나도 강렬하게, 아름답게 결정화된 순간들의 포착을 통해서이다. 섬에서 홀로 산책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천천히 이동하는 배가 보인다. 이어서 텅 빈 축구장에서 혼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끌고 들어와 낯선 관광지의 풍경 속에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 독해의 한 방법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미 주어진 이미지들과 대면하는 것은, 단순히 볼거리들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위험한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주어진 이미지들의 틈 사이로 우리의 의지를 기입하고자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즐거움이 생성되는 것이리라.
영화라는 도시를 걷는 산보객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미디어 중독증에 걸린 인물을 제시한 모레티는 세 번째 에피소드 ‘의사들’을 통해 징후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메커니즘 속에 내재한 모순과 허위를 폭로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그저 단순히 의료제도에 대한 비판과 불만으로만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가지고 잡담하면서 도시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제시한 첫 번째 에피소드와 미디어 중독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두 번째 에피소드와의 관련 속에서라면 이 에피소드는 좀더 넓은 해석의 영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기억을 끌어들일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극중에서 모레티가 앓고 있는 가려움증은 우리의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질병에 관한 전반적인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징후는 때로 오독되기도 하며 징후들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질병은 새로 정의되고 처방 또한 달라진다. 하지만 모레티는 질병은 단지 정의된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권위를 지닌 자들- 여기서는 의사들- 이 제각기 지니고 있는 해석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오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인 셈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관람자를 중독시키는 미디어의 힘과 마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어진 이미지들의 틈 사이로 우리의 의지를 기입하는 행위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러한 행위는 우리 자신의 끊임없는 감시와 성찰을 통한 예방행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레티가 앓았던 병은 사실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냉수 한잔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예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컵에 담긴 물을 마시다 갑자기 두눈을 똑바로 뜨고 스크린 너머의 우리를 노려본다. 그는 우리가 마치 텔레비전 화면 속의 인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라본다. 이는 온전히 스펙터클에 묻혀 있는 관람자들- 여기엔 극중의 ‘정의로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상적인 관객도 포함된다- 에게 가하는 비판이면서 동시에 그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 놓인 예리한 시선을 가질 것에 대한 권유이기도 하다. 더이상 실비나 망가노 주연의 영화를 보면서 그저 춤을 따라할 때와 같은 모레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이쯤에서 <나의 즐거운 일기>는 이미지들의 도시를 떠돌다 질병을 앓고 치유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각성한 인물에 대한 상상적인 짧은 여행기가 되는 것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언뜻 보기에 에피소드 상호간의 긴밀한 연결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일 이 에피소드 각각을 그저 따로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영화가 줄 수 있는 많은 재미를 놓치게 된다. 이 글은 그 결여의 부분들을 채우기 위한 여러 독법 가운데 하나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모레티는 많은 단서들을 영화 곳곳에 남겨놓았다. 구석을 뒤지는 것이 중요하다. 난니 모레티라고 하는, 영화라는 도시의 유쾌한 산보객은 이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한 기억의 무덤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잠시 숙연하게 명상에 잠긴다. 이러한 변두리를 그저 변두리가 아닌 하나의 틈새로 인식하는 것, 느리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 이러한 행위야말로 자꾸만 스펙터클해지거나 점점 심심해져가는 이미지들의 폭력에 맞서는 무기가 될 것이다.길지도 않은 영화의 역사가 어느새 고도(古都)로만 남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유운성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