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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섹스에 압도당한 역사의 관능

사극영화 흥행코드를 제시한 <쌍화점> <미인도>의 함정

<쌍화점>의 오프닝 시퀀스를 기억하는가. 영화는 충에 대해 묻는 어린 시절의 왕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몇몇 소년이 이에 대해 답한 이후, 똘망똘망한 눈빛의 소년이 충이란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 답한다. 그리고 왕은 늦은 밤 건륭위 숙소에 들러 이불 바깥으로 나온 그 소년의 ‘가녀린 발목’을 덮어준다. 그것도 에로틱하게. <쌍화점>이 ‘충’에 대한 질문과 답으로 시작해 ‘애정’에 대한 질문과 답으로 끝맺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오프닝 시퀀스는 무척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 이 오프닝 시퀀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성 방식이 아니라 이를 종결하는 미닫이문의 닫힘이다.

욕망을 포착하는 미닫이문의 움직임

표면적으로 보자면, 미닫이문의 닫힘은 시간의 비약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 문이 닫히는 그 순간이 무척 관능적이라고 느꼈다. 이는 미닫이문이 닫힌 이후 생략된 시간에 어떠한 사건이 감춰져 있는지 유추할 수 있도록 시퀀스를 구성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관능적이라고 느꼈던 대상은 미닫이문의 움직임 자체였다. 어쩌면 그것은 궁이라는 특수한 공간(사극영화라는 특정 장르도 함께)에서 무언가 훔쳐보기를 바라는 내 욕망을 포착한 숏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난 그렇게 무언가를 은밀히 감추는 듯한 숏이 좋다. 물론 이는 그것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 감춰졌던 무언가가 드러날 때의 어떤 쾌락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이 야기하는 쾌락을 거부할 수 없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혹, 그렇게 닫힌 문은 최근의 사극영화가 곧잘 ‘궁 내부’로 시선을 향하는 이유를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닫혀진 문, 그럼으로써 감춰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들춰내려는 관능적 욕망을 말이다. 롤랑 바르트는 관능에 대해, ‘옷이 하품하는 순간’, 달리 말해 감춰졌던 그 무언가가 은밀하게 그 하얀 속살을 드러낼 때의 야릇한 느낌과 연관시킨다. 궁 내부는 범인(凡人)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그 내부의 일은 비밀이 되어 겹겹의 싸개에 둘둘 말려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감춰진 것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의 관음증적 시선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최근 궁을 소재로 한 사극영화에서 ‘관음증적 시점숏’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음란서생>은 내시가 왕비와 대신의 정사(궁에서 펼쳐지는 정사는 아니다)를, <궁녀>는 궁녀가 왕과 왕비의 정사를, <쌍화점>은 왕이 왕비와 정인(홍림)의 정사를 훔쳐본다(좀더 넓은 맥락에서는 <미인도> 역시 이에 포함될 수 있다). 물론 관음증적 숏은 정사장면에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궁을 주요 공간으로 설정한 이들 영화에서 관음증적 숏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들 영화가 어떤 감춰진 것,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훔쳐볼 때의 관능적 쾌락에 매혹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쌍화점>은 파멸로 치닫는 치정극을 궁과 결합시킴으로써 그 관능의 매력을 배가시키려 한다. 외부로 공개된 공적 삶이 아닌, 차단되었던 얽히고설킨 ‘사적 관계’가 만들어낸 치정(癡情)이야말로 궁을 더 관능적으로 보이도록 유혹하는 소재가 아니겠는가. 다스리는 왕이 아닌 시련의 상심에 빠진 왕, 호위무사가 왕에게 동성애의 사랑으로 충을 바치고, 호위무사가 왕후와 또 다른 사랑을 나누다 왕과 호위무사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치정극은 궁이 하품하다 못해 발가벗는 순간이다. 그것은 그저 다른 누군가의 일기장이 아니라, 금서와도 같은 일기장에 가깝다. 실제로 <쌍화점>은 액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보다는 궁 내부의 특수한 사적 관계가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쌍화점>의 엔딩에서 두 사람은 칼싸움을 하는 척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말싸움에 가깝다. 때로 말은 칼보다 더 무서운 비수가 되기도 하는 법. 왕에게 자신을 정인(情人)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홍림의 말은 칼보다 더 무서운 비수가 아닌가. 물론 이러한 치정극은 궁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궁은 금지의 공간이고, 거세되었다 하더라도 왕은 금지의 담지자이다. 중요한 것은 왕이 거세된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이 궁 바깥으로 알려지면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궁 내부의 ‘사적 삶’이 관능적인 매력을 지니는 이유, 달리 말해 훔쳐볼 만한 것으로 자리하는 이유일 것이다.

춘화 재현, 역사는 잊고 침만 꿀꺽~

궁이 아니어도 좋지만 궁일 때 더욱 관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팩션 사극영화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굳이 역사적 배경으로 구성될 필요는 없지만, 역사적 배경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그 흥미가 반감되는. 이러한 면에서 최근 팩션 사극영화의 역사적 사실은 극의 성립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기보다는 충분조건에 가깝다. 물론 <1724 기방난동사건>처럼 퓨전사극 형태로 현재의 시간을 노골화하여 그 유희성을 강조하는 사극영화도 존재하지만(이에 대해서는 이현경, ‘역사적 유희라는 모호한 실험’, <씨네21> 682호를 보라), <왕의 남자> <미인도> <쌍화점>으로 이어지는 팩션 형태의 사극영화는 감춰졌던 역사의 속살(그것이 픽션으로 구성된 것일 수도 있다)을 바라는 관객의 관능적 욕망과 조응한다.

픽션이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야 하는데, 이때 역사적 사실은 픽션이 관능적 매력을 부여하는 대상으로서 지위를 갖는다. 즉, 팩션의 관능미는 픽션이 그 특유의 역사적 가정법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옷을 들출 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픽션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지나치게 비약할 경우 어떤 초라한 결과가 만들어지는 <궁녀>의 사례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최근 신윤복에 대한 신드롬은 픽션과 역사적 사실의 균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신윤복이 여자일 수 있다는 설정이 황당무계한 주장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윤복이 남긴 그림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 그 신뢰성을 확보한다면 픽션은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다 못해 풍요롭게 한다.

픽션이 역사적 사실의 속살을 비추는 관능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픽션이 역사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팩션 사극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은 픽션을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팩션의 특징은 <미인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윤복(김민선)의 속화가 탄생하는 순간을 따라가는 일련의 사건 전개에서, 그(녀)의 속화(역사적 사실)는 픽션에서 파생된 성적 호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하지 않는가. 특히 멱 감는 여인에서 시작해 중국에서 건너온 춘화를 몸짓으로 재현하는 장소에 이르는 동선은, 표면적으로는 신윤복 그림에 내재한 에로티시즘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신윤복을 통해 그 자리에 당도했지만, 춘화의 재현하는 그 몸짓을 보는 순간 그러한 사실을 잊고 그 장면 자체에 꿀꺽, 침을 삼킨다.

파격적 성체위의 재현에 내재한 위험

물론 팩션 사극영화에서 이러한 픽션의 역할은 과거의 역사에 현대적 숨결을 불어넣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현재의 시간에 좀더 광범위하게 소통시키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근 사극영화에서 이를 위해 활용되는 것이 화려하다 못해 호사스런 의상과 미장센, 그리고 담대한 성적 묘사이다. 동성애적 설정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동성애적 관계는 과거의 역사 속에 실재했던 사실이지만, 그것이 ‘상업영화’의 소재로까지 선택된 것은 현재의 문화적 트렌드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역사가 실제적인 사실이었던 동성애를 두터운 외투 속에 감추고자 했음을 감안한다면, 사극과 동성애의 조우는 동성애적 관계를 더욱 관능적으로 느껴지도록 한다.

하지만 발가벗은 몸이 역사에 현대적 감각을 부여한다고 해서 이에 내재한 위험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미인도>에서 하품하던 역사가 벗겨진 여성의 몸과 두 남녀의 섹스라는 노골적 관능에 압도당할 때, 닫혀졌던 역사의 속살을 훔쳐보던 시선은 (여성의) 몸을 탐닉하는 시선으로 전환되고 만다. 이는 <쌍화점>에서 피트니스클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대 남성 몸의 전시나 점차 파격적으로 나아가는 성체위의 재현에 내재한 위험이다(<미인도>만큼은 아니다). 문제는 관능의 대상이 은유적 속살에서 실제적 속살로 전환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이 몸의 재현에 고착되어 멈춰버릴 때 역사의 관능미가 사라지고 만다는 점이다.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벙어리인 과거가 현재의 입을 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낡은 과거가 현재의 프리즘을 통해 새로운 빛깔을 띠는 것 역시 그러하지만, 그것이 역사를 향한 시선을 지워버린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면, 더이상 역사는 픽션을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미인도>와 <쌍화점>은 사극영화의 가능성(또는 흥행 코드)을 제시했지만, 이는 또 다른 함정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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