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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효] “촬영하는 매 순간 참기 어려웠다”
이영진 사진 오계옥 2009-01-14

<쌍화점> 왕후 역 송지효

2003년 봄, 송지효는 난생처음 토슈즈를 신었다. <여고괴담3: 여우계단> 오디션을 통과한 뒤였다. 극중 역할 때문에 발레를 배워야 했던 송지효는 스트레칭 때만 해도 몸치에 가까웠다. 얼마 뒤 송지효는 ‘기적’을 선보였다. 분홍색 토슈즈를 신고 무리없이 걸었다. “처음치고 굉장히 잘 버틴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발레를 배운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 이번엔 점프까지 했다.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그날 송지효의 발목에선 ‘뚝’ 소리가 났다. 착지 때 실수했고, 그 자리에서 송지효는 주저앉았다. 모두들 괜찮아요, 몰려들었다. ‘붓기 전에 빨리 병원에 가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고개를 저었다. 송지효였다. 아파서 울면서도 ‘쪽팔리다’고 병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쌍화점>의 왕후 역을 맡고 “촬영 내내 도망가고 싶었다”는 송지효의 말을 들으면서 뒤늦게 5년 전 그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깡으로 버텼다면, 이번에는 무엇으로 견뎠을까.

-무대인사와 인터뷰 일정 때문에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겠다. =하루 일정 소화하고 집이나 숙소에 가면 기절한다. (웃음) 서울, 대구, 부산까지 첫주에 다 돌았는데 새해 시작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반겨주셨다. 특히 부산은 <> 무대인사 일정이나 동선과 비슷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이지만 1주일 동안 160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중 스코어가 가장 좋은데. =기분이 좋긴 한데, 그렇다고 피부로 느껴지는 건 별로 없다. 전국의 극장을 돌면서 매진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주위 분들이 잘되고 있더라고 많이들 이야기해주신다.

-영화 개봉 뒤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가. =나쁜 소리를 할 리는 없잖나. 다들 잘해냈고 고생했다는 말 하시더라.

-고생했다는 반응만으로 흡족하나. =배우라는 직업이 저 혼자 좋다고 되는 건 아니다. 보는 분들이 평가를 해줘야 하니까. 고생했다는 말이 부족하고 또 힘들었던 지난 1년에 대한 보상 같아서 만족한다.

-개봉 이후에 인터뷰를 하니까 어떤가. =공개 전엔 말을 아꼈어야 했는데 안 그래도 되니 편하다. 꺼리고 피한다고 생각했을 질문들에 대해서도 이젠 결심이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진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만만치 않은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을 텐데. =센 역할이니까 더 매력적인 것 아닌가. <쌍화점>의 왕후는 왕의 부인이 아니라 왕후로 받아들여지더라. 게다가 (상황에 따라) 이중적인 성격도 부각되는 캐릭터다.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 오디션 때 처음 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친 데가 하나도 없어서 인상 깊었고, 그 느낌이 좋아서 캐스팅했다고 말하더라. =우헤헤. 인터뷰는 아직 못 봤다. 안 고쳐서 다행이다. (웃음) 왜 나를 캐스팅했는지 궁금증이 있었는데 속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무색무취의 배우에게 색깔을 입혀주고 싶다고만 하셨다. 예쁜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이웃집 아이 같기도 하고 그랬다면서.

-외모만 놓고 보면 나이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 동안이지만 30대로 보이기도 한다면서. =나이가 비밀인 직업을 갖고 있으니 장점 아닌가. (웃음) 실제로도 그런 말 많이 듣는다. 분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바뀌는 얼굴이다. 화장하면 못 알아보는 분들도 많다.

-오디션 때 잠깐 만났던 감독을 직접 겪어보니 어떻던가. =그때 출연작이 <여고괴담3: 여우계단>밖에 없었다. 어렸고 경험도 없으니 그때는 정말 말 그대로 감독님이었다. <쌍화점>에 출연키로 한 뒤에도 주변에서 많이 힘들 것이라고 귀띔해주더라. 아무도 뭐가 힘들다고 말은 안 해줘서 답답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하나. 그냥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 헤쳐나가는 수밖에.

-이전 인터뷰를 보니까 현장에서 ‘과대평가된 배우’라는 쓴소리도 들었다던데. =감독님이 화를 내시진 않는데 직설적으로 표현하신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저 이만큼 할 수 있어요’라고 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나 또한 배우로서의 내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촬영 때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걸 인정해야 하는 게 쉽지 않더라. 그런데 신기한 건 촬영 끝나고 나니까 감독님의 그 직설이 그립다.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에서 유하 감독과 작업한 적 있다. 주진모도 아무래도 남자배우이다 보니 감독과 대화하는 것이 좀더 편하고 수월할 수 있다. 소통에 있어 불편한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현장에서 여배우 대접 바라는 것 같나? 촬영 전에 감독님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감독님도 내가 한복 입고 있으면 ‘안 무겁냐’고 농담하시고. 그보다 감독님은 자신의 캐릭터를 배우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신다. 특정 배우나 캐릭터를 편애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나 감독님은 아빠 같은 분이었다. 다만 감독님의 설명을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예민하지만 내가 둔하기도 하다.

-정사장면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반응도 있다. 시나리오에선 영화와 달리 마지막 베드신 묘사가 강하지 않던데. =왕이 이성을 잃으려면 왕후와 홍림이 그 정도 모습을 보여야 했던 것 아닐까. 그저 옷 벗고 키스하고 만진다고 베드신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영화 속 여러 차례의 베드신 안에는 서로 모를 때의 어색함도 있고, 그 다음에 찾아오는 이끌림도 있고, 주체할 수 없는 격한 욕망도 있다. 감독님이 베드신에서 클로즈업을 많이 쓰신 이유도 감정을 담기 위해서다.

-베드신 때도 모니터를 했나. =테이크마다 한 건 아니다. 민감한 장면이니까 들락날락하기도 뭣하고, 모니터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왔다갔다하며 체크할 여력도 없었다.

-유하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남성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반면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고 주변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쌍화점>은 어떤 것 같나. 여배우 입장에서는 현장에서 뭔가를 더 발휘하고 싶은 때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쌍화점>은 왕후 캐릭터가 분명한 영화다. 동성애 영화라는 식으로 부각됐지만, 실은 멜로드라마다. 홍림과 왕, 홍림과 왕후, 왕후와 왕의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촬영 내내 감독님은 이 장면에서 누가 확실히 보여야 한다는 목적을 배우들에게 분명히 했고, 그게 안되면 계속 재촬영, 재촬영이었다. 내 캐릭터를 더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님에게 요구를 하는 것은 내가 받아들였던 시나리오를 배신하는 것이고, 상대 배우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최종 편집에서 빠진 장면 중에 왕후의 캐릭터를 더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나. =홍림과 왕후의 대사 장면이 하나 있다. 이 장면에서 왕후는 국모라기보다 한 남자의 여자처럼 농담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런다.

-촬영하다가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매 순간 참기 어려웠다. 감독님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지극히 특별한 걸 원하셨다. 하늘과 땅을 몇번씩 오가야 한다. 그 중간의 진실한 지점을 찾는 데 있어서 다른 배우들은 경험이 있으니까 비교적 쉽게 해결했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많았다.

-테이크를 반복하다 보면 감독이 요구하는 진실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던가. =한 차례 촬영을 더할 때마다 감독님의 디렉션이 하나씩 추가된다. 그런데 그걸 담고 있으면 어색해진다. 계산하게 되니까. 그걸 비우고 가야 과장도 과소도 아닌 진실을 전할 수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겠더라.

-<쌍화점>에서 다들 안정된 목소리 톤이 좋다고 한다. =(당신만) 안 좋았나보다. (웃음) 난 목소리 때문에 주변 분들한테 안 좋은 소리 많이 들었다. 워낙 보이스톤이 낮아서 밝은 캐릭터를 할 수 있겠냐고 많이들 말씀하셨다. <쌍화점>은 후시녹음이 많은데, 다 감독님이 잡아준 거다. 결과물을 보니 감독님이 원했던 톤을 알 것 같다.

-<여고괴담3…> 촬영 전 연습 때 윤재연 감독과 대화하는 걸 보면서 다른 배우들에 비해 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크구나 싶었다. 물론 당시 제작진은 송지효라는 신인배우의 날것 같은 느낌을 좋아했지만. =첫 번째 작품이었고, 어떤 결과물을 위한 과정인지 전혀 감을 못 잡았다. 이전에 연기라는 것을 따로 배우지도 않았고. 열심히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는데, 호기심만큼이나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많이 받기도 했던 때다.

-<>(2004)을 찍고 나서 <색즉시공 시즌2>(2007) 사이에 <> <주몽> 등 드라마를 주로 찍었다. 대개 드라마를 찍다보면 순발력이 좋아진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순간적인 대응만이 아니라 캐릭터를 빨리 입고 빨리 벗을 수 있는 순발력도 좋아졌다. <주몽>은 게다가 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연기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이젠 가물가물하다. 압구정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매니저를 만나서 3년 정도 광고 모델을 하다가 연기까지 하게 된 거니까.

-기다리던 제안이었나, 아니면 갑자기 흥미가 동한 건가. =광고 모델 제의는 한번 받았으면 의심했을 거다. 아버지가 건축디자인 일을 하시는데, 어렸을 때부터 딱딱 떨어지는 내 성격과 건축이라는 분야가 비슷했다. 그런 동질감 때문에 그쪽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제의하신 분이 여성이었는데,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믿음이 갔다. 광고 일 할 때만 해도 매번 재밌구나 했는데, 연기 시작한 뒤로 항상 어렵구나 생각한다.

-지금까지 찍은 영화 네편을 보면 장르가 다 다르다. 일부러 고른 건가. =이번에 스릴러 했으니 다음에 코미디 하자. 뭐 그렇게 장르를 선택해서 출연할 만큼 정치적이진 않다. 캐릭터를 쫓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다.

-예전에 <>을 끝낼 무렵 뒤늦게 홈페이지에 그동안 두려워서 댓글을 안 봤다고 글을 쓴 걸 봤다. 이후 <색즉시공 시즌2> 때도 선정성 논란이 있었고. 인터넷에 오른 대중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편인가. 아니면 새겨두는 편인가. =어떨 것 같나.

-쉽게 넘기는 것 같지만 속으론 부담을 꽤 가질 것 같다. =그렇게 보이나? 일부러 마음에 상처를 내진 않는다. 불편하면 안 보면 되는 것이고. 그런 상황은 안 만들려고 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마음에 품은 배우가 있나. =어렸을 때 <약속> 보면서 전도연 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했다. ‘디렉터스 컷’ 파티에서 우연히 한번 뵌 적 있는데 그때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굉장해 보였다.

-<여고괴담3…> 때는 발레 배우고, <색즉시공 시즌2>에서는 수영 배우고, <쌍화점>에서는…. =비파 배웠다. 하나씩 배워두는 게 도움이 된다.

-이전에 액션영화 하고 싶다고 했다. <미녀삼총사> 같은. 격한 격투기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캐릭터가 원하면 해야지. 그런데 딱히 운동쪽은 몰라서. 그렇다고 내가 K-1을 배우겠나?

-다음 작품은 정해졌나. =아직. 다만 맵고 짜고 싱겁고 달고 뭐 이걸 따질 상황은 아니다. 아직도 굶주린 상태라 뭐든 맛있게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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