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 때 아주 잠깐 장난전화에 맛을 들였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전화기를 돌렸는데 그 수준이라는 게 아무 번호나 눌러서 “거기 캔디네 집이죠?” 하는 수준의 유치한 짓거리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야 ‘이뭐병’ 했겠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그저 애들일 뿐인데, 애들인데 뭐 어때 장난전화쯤, 이라고 우리의 짓거리를 정당화하곤 했는데….
난 몇달 전부터 장난전화질하는 아저씨 처음 봤고, 황당했을 뿐이고, 그저 배꼽 뒤집어졌다. 다름 아닌 케이블 채널의 <더 폰>이었다. 성대현과 고영욱, 신동욱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한 시간 내내 전화기 붙잡고 장난전화만 해댄다. 유치원에 전화해 돈있는 샐러리맨이라고 속이며 학력 세탁을 위해 유치원에 기부입학을 하고 싶다고 애걸하고, 다짜고짜 비디오 가게 주인이라면서 연체된 에로비디오 반납하라고 박박 우기며, 지구 온난화로 인해 독도가 일본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으니 밧줄로 독도를 옮기는 퍼포먼스에 동참해달라고 권유도 한다.
장난전화를 TV프로그램으로 ‘승화’시킨 날로 먹기 발상도 허를 찌르지만 더 즐겁게 보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을 너무나 열심히, 너무나 좋아라 하면서 하는 진행자들의 모습이다. 특히 본인이 ‘센터’임을 바득바득 우기지만 셋 중 생활인의 풍모가 가장 진하게 풍기는 성대현의 해맑은 모습을 보노라면 백만 가지 감정이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이 무슨 신기원이 열린 게 아닐까 하는 망상적 결론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왕년의 아이돌 성대현. 사실 아이돌이라고는 하나 R.ef의 팬이 아니었던 나는 성대현을 알지 못했다. <라디오 스타>를 보고서야 좋은 시절 다 지나간 그를 알게 됐는데 화제가 됐던 그의 출연회를 보면서 박수를 쳤던 한 대목이 있다. 성대현이 <찬란한 사랑>이라는 전성기 히트곡을 회고했을 때다. 그 노래를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랩도 아닌 이상한 절규 같은 앞부분이 너무 해괴해서였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기엔 ‘초큼’ 늙어 있었고 그래서 노래를 들을 때도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던 나는 그 노래의 앞부분을 들을 때마다 ‘왜 저래?’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날 성대현은 이 노래를 공연할 때 “한번도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하이파이브! 나는 살짝 감동먹었다. 몰락한 아이돌이 생활인으로 거듭날 때에 가지게 되는 진실함과 견실함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본인 고백한 바, 이성욱이 없으면 자생할 수 없었던 좀 약한 아이돌 성대현은 아저씨가 돼서 자생력을 얻은 듯하다. <라디오 스타>에 나온 뒤 여러 주요 매체에 단독(!) 인터뷰가 등장하는데다 여러 프로그램에 고정출연을 하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그를 보는 게 가장 즐거운 건 역시 <더 폰>이다.
나이도 어리고 결혼을 안 해서인지 연예인 필이 아직도 남은 두 남자와 달리 성대현은 액면가, 즉 어린 딸 가진 평범한 아저씨로 보인다. 하다못해 다른 예능 늦둥이들인 윤종신이나 김구라처럼 별다른 캐릭터도 없다. 그런 그가, 옆집 좀 삭은 오빠 같기도 하고, 젊은 아저씨 같기도 한 그가 전화기를 붙잡고 헛소리- 그렇다. 장난전화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다- 를 하면서 킬킬거리는 모습은 꽤나 전복적이다. 정시 퇴근해 집에 들어와서 장난전화로 소일거리를 하는 남편이나 삼촌이나 아빠를 상상해보시라. 상상 안된다.
그런데 이 칼럼을 쓰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저씨 성대현보다 내가 한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킁킁. 아저씨라고 해서 미안하네 동생.
김은형 아저씨의 은밀한 매력을 찾아내기 위해 탐구하지만 사실은 ‘영맨’을 몹시 사랑하는 <한겨레> esc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