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뜻함.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기엔 쑥스러운 취미나 금지된 장난 등이 길티 플레저의 예가 될 수 있다.
사실 난 춤을 잘 춘다. 아니 잘 췄다. <영화는 영화다> 속 나이트 클럽신을 찍을 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나이 서른이 넘기 전까지 난 열심히 홍대 클럽을 드나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종교적인 엄숙함에 눌려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경박하지 말라 하셨고, 기분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들뜨지 말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말이다. 난 조용한 아이였고, 또 조용한 아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대학생이 된 뒤, 우연히 좀 노는 친구들을 따라 홍대 앞 ‘발전소’라는 클럽에 처음 가보게 됐다. 첫인상은 특이했다. 맥주는 버드와이저 캔만 팔고, 안주는 새우깡이 다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 마신 빈 캔은 무대 위의 커다란 금속 그릇에 던져넣었다. 여기저기서 빈 캔들이 무대 위 큰 그릇을 향해 날아다녔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을 위해 춤을 추었다. 참고로 클럽은 부킹이 없다. 그냥 춤만 출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조용하지 않아도 됐고, 맘껏 들떠도 됐다. 그 뒤 클럽은 나의 유일한 일탈공간이 됐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춤을 추고 싶으면 발전소에 갔다. ‘몸치’였던 나는 내 스타일의 춤동작 몇개를 만들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내 몸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다. 20여년을 넘게 살아온 나의 몸이 그제야 비로소 내 것이 된 듯한 느낌! 카타르시스 그 자체! 춤이 나이고, 내가 춤이 되는 물아의 경지! 과장이 아니었다.
난 낮에는 여전히 얌전한 아이였지만, 밤이 되면 나만의 세계로 빠졌다. 당연하게도 나의 춤은 나에게 최고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타인들에게도 인정받을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괴리감.
그러던 어느 날, 같이 간 친구들을 한쪽에 내팽겨쳐둔 채 혼자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나에게 접근해왔다. 난, 한껏 달아오른 몸의 리듬을 아쉽지만 뚝 끊고는 잠시 멈춰 그녀를 보았다. 조명이 어두웠다. 음악은 시끄러웠다. “저기요, 춤추는 게 너무 멋있어서 그러는데요. 같이 추실래요?” 그녀는 나의 춤에 반한 듯했다. 나는 나의 춤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기쁨과 함께 그동안 흘린 땀에 대한 보상감에 젖었다.
내 춤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니! 고마운 사람! 그녀는 나와 같이 춤을 추는 듯하더니, 비틀… 나에게 안겼다. 난 생각했다. 나의 춤도 대중성이 있구나! 스스로 이런저런 위안을 마음속으로 던질 무렵. 그녀의 친구인 듯한 여자가 그녀를 붙잡아 끌었다. 그녀는 친구를 뿌리치며 가기 싫다고 했다. 무슨 일인가. 그녀의 친구가 말하길, “죄송해요. 이런 애가 아닌데… 너무 취해서…”. 그 말에 다시 그녀를 살펴보니, 나를 보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초점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친구에게 끌려갔다. 나는 너무나 서운했다. 모르는 이성과의 혹시 모를 인연에 대한 서운함보다 나의 춤이 정상적 시력활동을 가진 사람에겐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쨌건 난 주위에서 알게 모르게 서른 무렵까지 거의 10여년을 클럽에 다녔다. 물론 영화를 시작하며 그럴 여유가 없어졌지만.
영화감독이 된 뒤 생각하게 됐다.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좀더 배려하는 태도라는. 물론 모든 일적인 만남이야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나는 진지해지기 위해 다시 가벼워지고 싶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만은 자유로웠던 그때처럼!
장훈 영화감독. 2008년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했으며 <사마리아> <빈 집> <활> 등 김기덕 감독 영화의 연출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