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연수씨와 김중혁씨가 영화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두 사람은 현재 한국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견 소설가들이자 오랜 지기입니다. 김천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만나서 문학 이야기는 절대 안 한다는 두 사람은 이제 지면을 통해 매주 번갈아가며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영화와 삶에 대한 두 사람의 독특한 감성과 함께, 친구 사이의 정겨운 대화를 엿듣는 듯한 재미도 맛보시기 바랍니다.
김연수가 김중혁에게
스페인 말라가에 갔다. 왜 거기에 갔는지는 한동안 미스터리였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말라가에 대해 말했다. 안달루시아의 항구 도시라고 했다. 구글 어스로 위치를 확인한 뒤, 스페인 셋집을 중개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파트를 발견했다. 지중해까지 걸어서 5분. 그 다음 날, 나는 계약금을 송금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스페인으로 떠나기 사흘 전에 일어났다. 송금한 뒤부터 나는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말라가는 말이야, 피카소의 고향으로 평생 뜨거운 태양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북유럽 사람들이 모여드는 코스타 델 솔의 중심지이자…”, 중얼중얼. 살다보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어처구니없는 곳에 쓰게 되면 인생이 바뀐다는 걸 알게 된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일단 빚을 내서 요트를 한대 사보길 바란다. 요트 정도는 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당신은 평생 바다를 동경했었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정말 오랜만에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저는 말라가가 굉장히 좋은 곳이라는 걸 믿습니다. 제가 구한 아파트에서 지중해를 볼 수 있으리라는 걸 믿습니다. 집주인은 몸매가 늘씬한 독신 여자라는 걸 믿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말라가에서 택시 운전사는 남들은 운동 삼아 달리는 해변 길을 10분 남짓 운전한 끝에 20유로라는 요금으로 나를 환영했다. 역시 최고의 휴양지라 바가지가 심하군. 나는 웃으면서 5유로를 깎았다. 택시에서 내렸더니 키 큰 야자수가 자라는 정원이 딸린 3층짜리 빌라였다. 주인은, 어쨌든 스페인 여자였다. 그녀는 므훗한 미소를 짓는 나를 빌라 뒤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에 내가 한국에서 구한 아파트가 있었다. 그 아파트는 뜨거운 지중해의 햇살을 받아서 더욱 선명해진 빌라 그림자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낮이나 밤이나. 여름에는 참 시원하겠군. 그 그림자를 보면서 나는 집세를 주인 아줌마에게 건넸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집세까지 줬으니 짐을 다 풀었다. 그 아파트는 곧 명작의 산실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나는 정 못 참겠으면 사용하라던 전기난로를 켠 뒤, 침대의 이불까지 들고 와 온몸에 친친 감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아직 해도 안 떨어진 시각이었는데, 마음껏 쓸 수 있다던 인터넷은 접속 불가였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단다. 오히려 잘됐다. 책이나 실컷 읽자.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져온 책을 다 읽었다. 어찌나 추웠던지 명작의 산실은커녕 있던 명작도 얼어 죽을 판이었다. 이번에는 영화를 봤다. 일생 동안 내가 본 영화는 그리 많지 않으며, 나는 본 영화들만 다시 본다. 먼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감회가 새로웠다. 배우들, 얼마나 고생했을까. 이 얘기는 다음에. 그리고 <델마와 루이스>와 <브레드레스>와 <그랑블루> 등등. 보고 또 봤다. 결국 얼마간 돈을 떼이며 끝내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던 그 아파트에서 나와 이베리아반도의 싱글 룸과 여러 명이 같이 묵는 도미토리를 전전할 때까지.
마침 그때 <씨네21>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왔다. 얼떨결에 나는 그만 “영화라면 제가 좀 봤는데…”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지중해 옆이라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운데다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서’라는 말을 그만 빼먹었다. 내가 말라가까지 가게 된 이유는 결국 <씨네21>에 글을 쓰기 위해서였을까. 이건 달러 빚을 내서 요트를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체력은 빌릴 수 없어도 머리를 빌릴 수 있으니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영화에 대해 문의할 친구를 마련해놓았는데, 그 친구도 같이 연재한단다. 아놔.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등 10여편이 넘는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발표했고 제34회 동인문학상, 2005년 대산문학상,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소설 집필을 위해 스페인에 3개월여간 체류하다 막 돌아왔다.
김중혁이 김연수에게
스웨덴 스톡홀름에 왔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나도) 지금까지 미스터리다. 어느 날, 누군가가 스톡홀름에 대해 말했다. 노벨상의 도시라고 했다. 하하하, 언젠가는 나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테니까 미리 가보는 것도 좋겠네, 하하하, 스웨덴 한림원 사람들과 인사도 좀 하고, 하하하. (좌중 침묵) 이런 실없는 소리까지 해가며 스톡홀름에 왔다. 스톡홀름으로 간다는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한마디씩 충고를 해주었다. “맙소사, 한겨울에 스톡홀름에 간다고? 말리고 싶다”, “거긴 겨울이 되면 오후 4시에 해가 떨어져. 아주 캄캄해지지”, “볼 거라곤 아마 공원묘지밖에 없을 거야” 등등. 그들의 걱정어린 충고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난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좋고, 햇볕 알레르기가 있으니 일찍 해가 지는 게 좋고, 좀비소설을 준비하고 있으니 공원묘지는 꼭 가봐야 해”라고. 충고한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내저었던 그 사람들 심정을 이제 이해한다. 해가 일찍 진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내 몸에서 자랑할 만한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시력이다. 나의 시력은 줄곧 좌우 2.0이었으며 지금도 좌우 1.2 이상을 기록한다. 책을 읽고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 중에 이렇게 뛰어난 시력은 흔치 않다(책을 읽고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 중에 이렇게 책을 많이 읽지 않고 많이 쓰지 않는 사람도 흔치 않을 거다, 라는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거나). 타고난 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북유럽에 와서 내 시력이 평생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곳은 모든 게 뿌옇다. 물체는 흐릿하고, 풍경은 희미하며, 하늘은 칙칙하다. 어딜 봐도 명쾌하고 쨍한 풍경이 없다. 가끔 파란 하늘이 등장하면 나는 계속 하늘만 바라본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놀라운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스키모들은 시력이 5.0이라던가- 나는 눈이 점점 흐릿해진다. 낮이야 그렇다치고 문제는 긴긴 밤이다. 이곳 사람들은 절약정신도 어찌나 뛰어난지 모든 불빛이 희미하다. ‘어머, 저희 집 풍경을 보여드릴까요? 저희는 이렇게 살아요’ 광고를 하나 싶을 정도로 그 밝은 형광등이나 백열등을 다 켜놓고 사는 한국의 아파트 풍경이 그리울 정도다. 밤이 기니까 전력을 아끼려는 건지, 모든 게 희미해서 그 정도 불빛으로도 불편함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내 눈은 더욱 침침해져 간다.
‘짐도 많은데 책은 왜 들고 가? 읽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쓰지 뭐, 하하하’라고 소리치며 책 한권 들고 왔는데 그건 진작에 다 읽었고, 소설을 쓰기 위한 참고용으로 들고 온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좀비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라지만 어쩌자고 이런 영화들만 들고 온 건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데빌스 리젝트> <스턱> <28주 후…> <새벽의 황당한 저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등등 어느 작품 하나 빠지지 않고 면면이 어둑하고 칙칙하다. 어둠 속에서 그런 영화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여기가 어딘지, 한국인지 스웨덴인지, 천국인지 지옥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화면도 어두웠지만 화면 바깥도 만만치 않게 어두웠다.
마침 그때 <씨네21>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왔다. 얼떨결에 나는 그만 ‘영화라면 제가 좀 봤죠’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주로 사람들 죽는 영화로만’이라는 말은 빼먹었다. 말하기에도 무서웠다. 내가 스톡홀름에 온 이유는 <씨네21>에 글을 쓰기 위해서였을까. 시력을 잃는 대신 원고료를 받는 것일까. 시력은 되살릴 수 없어도 안경은 맞출 수 있으니 우리 함께 눈 버리며 영화 보자, 친구여, 아놔.
김중혁 소설집 <펭귄뉴스>와 <악기들의 도서관> 등의 소설집을 냈고 2008년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 2007년엔 잠시 <한겨레> 기자로 활동하며 esc섹션을 꾸미기도 했다. 소설 집필을 위해 스웨덴에 2개월간 체류하다 막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