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9·11에 심취해 있던 할리우드가 새로운 소재를 찾았네요. 바로 경제 위기입니다. 겨울 시즌 판매만으로 한해 실적을 모두 거둔다는 4/4분기 ‘미친 몽땅 세일’에도 적자를 볼 정도로 지금 미국의 경기 침체는 피부까지 와닿았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스튜디오마다 카오스에 빠진 경제 위기를 그리는 영화들을 앞다투어 기획 중입니다.
첫 타자는 바즈 루어만 감독입니다. <위대한 갯츠비>의 리메이크를 추진 중이라고요. 1974년 로버트 레드퍼드가 연기한 갯츠비가 떠오르는군요. 원작이 1920년대 경제공황이 배경이니 “관객에게 지금의 경제적인 위기를 환기시켜줄 수 있는 작품이다”라는 감독의 말씀. 어쨌든 지금 <물랑루즈>나 <오스트레일리아>같이 돈 퍼붓는 영화 만들었다가는 “감독님 취하셨어요?”라는 소리 듣기 십상일 테니 현명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마이클 무어의 쓴소리가 빠질 수 없겠죠. 역시 관망하거나 대책을 세우는 대신 무어답게 책임을 물을 태세군요.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무어의 2009년 프로젝트는 바로 오바마 정권의 출범과 부시 정권의 퇴진이 교차하는 시기를 파고듭니다. 오바마 정권의 출범, 지난 부시 정권이 세계 경제 위기에 어떻게 ‘공헌’했는지 제대로 까발리자는 계획이죠. 벌써 자신의 웹사이트에 침체의 원인을 제공한 부시 정권에 대해 한말씀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집을 저당잡힌 줄 아나? 정부는 바보 같은 국민이 자기 능력 이상의 대출을 해서라고 한다. 천만의 말씀. 빌어먹을 의료비 청구만 없었으면 이놈의 위기도 오지 않았다.” 미국을 이렇게 확 뒤집는다고 하니 속이라도 시원해지겠군요.
끝이 아닙니다.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영국 <BBC>에서도 경기 침체기를 다룬 드라마를 준비 중이라네요. 뭐, 멀리 볼 것 없이 개인파산, 면책이 판을 치는 한국에서도 거품 경제의 위기를 그린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소설 <화차>를 영화화하는 걸 떠올리면, 남의 일이 아니군요. 어쨌든 이런 고민거리를 가진 영화를 만드는 것만 해도 아직까지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작 감독들은 돈 떨어져서 영화 제작 안되고, 아트하우스 영화들까지 사라질 위기가 올까 떨고 있습니다. 이건 그러니까, 영화계까지 위기가 닥치기 전 보이는 징조 같아 좀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