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사람들에게서 종종 질문을 받는다. “괜찮은 이야기 없어요? 읽어볼 만한 책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사람마다 보는 눈은 다르겠지만(보고 싶은 것도 다르겠지만), “영화화를 염두에 둔다면 이 이야기 어떨까” 하는 소설들을 모아보았다.
탐정, 도시의 어둠을 살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조지 펠레카노스 지음/ 황금가지 펴냄/ 장르 스릴러, 액션
요즘엔 탐정보다 경찰이 주인공인 액션영화가 인기다. 첨단 장비를 활용한 전문적인 수사 기법이 범죄물의 대세가 되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탐정에게 끌린다. 경찰이 아니면서도 나름의 정의를 위해 악과 싸우는 탐정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야수 같은 존재다. 위법과 폭력의 경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탐정은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으로 적격일 수밖에 없다.
조지 펠레카노스가 창조한 워싱턴의 사립탐정 데릭 스트레인지는 중년에다 흑인이니 주류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존재 자체가 아웃사이더인 캐릭터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에서 스트레인지는 순찰 중에 동료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경관의 어머니에게 의뢰를 받아, 정당한 행위였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사직을 한 가해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에 추악하고 복잡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스트레인지는 지나치게 비관적이거나 냉정하지 않다. 도시의 어둠을 충분히 알고, 자신을 지킬 만큼 폭력적이면서도 나름대로 흥겹게 살아간다. 블랙스플로테이션영화의 번들거림이 더해진다면, 스트레인지는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것이다. /김봉석
아름다운 그녀를 향한 동경과 증오
<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장르 스릴러, 드라마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미모만으로도 모든 남자들이 숭배하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여인 유리코. 하지만 그녀의 종착점은 결국 창녀였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로테스크>는 ‘다른 사람을 이기고 싶다, 뛰어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그렇지 못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란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완벽한 비극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일본 최고 작가 중 하나인 기리노 나쓰오는 완강한 계층(계급)사회에서 짓이겨지고 내동댕이쳐지는 여인들의 인생을 비정하게 그려낸다. 여성들의 마음을 가장 잔인하고 냉혹하게 파헤친다는 평을 듣는 기리노 나쓰오답게 유리코를 둘러싼 세 여성의 캐릭터는 강렬하다 못해 숨이 막힌다. 아름다운 여인과 그녀를 질투하고 모방하는 여인들이 펼치는 동경과 증오, 파괴의 연쇄반응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화면에 기괴한 에너지가 들끓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테스크>에는 또 하나의 강렬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유리코를 죽인 중국인 남자. 시골에서 태어나 오로지 생존을 위해 여동생과 함께 도시로 나왔던 그가 일본으로까지 흘러들어오는 과정은 따로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특히 도시로 나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 장면은 어떤 전쟁영화도 능가할 정도다. /김봉석
웃긴 시간여행물 어때요?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열린책들 펴냄/ 장르 코미디, 역사
한국에서 어떻게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드냐고? 그럴 필요없다. 각색이 달리 각색이겠는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보고 나니 다른 문화권의 시대극을 잘 각색할 경우 충분히 멋진 영화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터라 과감하게 빅토리아 시대극의 각색을 상상해본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세계에서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근미래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주교의 새그루터기’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빅토리아 시대로 향하는데 그때부터 온갖 일이 펼쳐진다. 시간여행을 할 때 생기는 시차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정신적 멀미’는 글로 보는 것보다 영상으로 옮겨졌을 때 웃음의 파급력이 강한 설정.
코니 윌리스의 입담과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가 이 책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빅토리아 시대 같은 때가 없다는 점은 매우 아쉬우나 주인공이 일제시대 경성으로 간다면 빅토리아 시대 못지않게 가슴찡하게 아름다운 비주얼과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를 고루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이다혜
복수의 카타르시스!
<어벤저>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장르 스릴러, 첩보
복수는 언제나 달콤하다. 특히 보통 사람들이 절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이나 힘을 가진 악당을 가상의 영웅이 대신 처리해주는 것을 보는 것은 ‘픽션’만의 특권이다. 첩보소설의 거장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어벤저>는 그런 카타르시스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단히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진 <어벤저>를 보고 싶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가장 위험한 동굴수색대 임무를 맡았던 덱스터는 딸을 죽인 갱들을 직접 처리한 뒤 전문적인 어벤저로 일하게 된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도 가해자가 외국으로 도망쳐 손을 쓸 수 없을 때, 신출귀몰한 솜씨로 그를 잡아와 미국의 법정에 세우는 비밀 대리인이 된 것이다. <어벤저>는 국제 첩보전의 실상을 화끈하게 밝히는 첩보소설인 동시에 스릴러다. 거대한 적을 잡기 위해서 수많은 악당을 비호하는 국제정치의 후안무치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어벤저가 조란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탁월한 스릴을 안겨준다.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훌륭한 국제정세 강의는 기본이고 어벤저의 멋진 침투 공작과 액션까지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어벤저>를 영화로 본다면 아주 화끈할 것이다. /김봉석
거짓말같이 잔인한 사랑
<온 세상이 비라면>(中 <호박 속에>) 랜덤하우스 펴냄/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세상을 뒤덮은 악의가 나는 항상 두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인간입니다… 이들이 꿈꾼 장소가 정말로 있다면 나 또한 그곳으로 갔을 것입니다.’(이치가와 다쿠지) <온 세상이 비라면>은 그런 악의가 존재하는, 잔인한 세계를 감상적으로 그린 단편집이다. 그중에서도 <호박 속에>는 정말 처절하다.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호박 속에>를 영상으로 만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못생기고 뚱뚱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년 간다. 모든 남학생들이 동경하던 소녀 마키가, 그에게 말을 건다. 함께 그녀의 집에 가서, 섹스를 한다. 그녀는 한 남자를 죽였고, 그 남자의 시체를 처리해주기를 원한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어느 날 꿈결같이 다가온 사랑, 하지만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면 어떻게 할까? <호박 속에>는 영화화하기에 매력적인 요소들도 존재한다. 미소녀가 나오고, 섹스와 살인이 있고, 팜므파탈과 배신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호박 속에>의 진짜 힘은, 이치가와 다쿠지 특유의 처절하지만 투명한 이미지다. 투명한 호박 속에 갇힌 벌레처럼, 소년은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며, 끈질기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소년의 얼굴이 보고 싶고, 독백이 듣고 싶고, 그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 /김봉석
3부작으로 보고픈 장엄함
<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노블마인 펴냄/ 장르 드라마
영화의 장점 중 하나는 장대함이다. 작은 화면의 드라마로는 느낄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이나 대지의 장엄함을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는 대형 스크린이 필요하다. 심도 깊은 화면 역시. <반지의 제왕>을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그것이고, 사쿠라바 가즈키의 <아카쿠치바 전설>도 마찬가지다. <아카쿠치바 전설>도 반드시 3부작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제철소와 조선소가 있는 돗토리현의 베니미도리촌. 제철소 주인이자 마을의 ‘영주’인 아카쿠치바가의 며느리가 되는 천리안 만요부터 폭주족에서 만화가로 변신하는 게마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니트족 토코까지 여성 3대의 이야기를 사쿠라바 가즈키는 환상적인 필치로 써내려간다. 신화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팀 버튼이 몽환적인 터치로 영화화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카쿠치바 전설>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은 리얼리티다. 사쿠라바는 일본의 현대사를 소설 속에 완벽하게 녹여낸다. <아카쿠치바 전설>은 환상적인 신화시대가 어떻게 풍화해가며 인간의 시대로 전락하는지를 숨가쁘게 묘사한 걸작이다. 그런 점에서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시마 데쓰야 같은 감독이 제격일 것이다. /김봉석
좋은 친구 같은 이야기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북스피어 펴냄/ 장르 드라마
신체적·정신적 장애는 극복의 대상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장애보다 ‘정상’이 더 좋고, 그래서 ‘정상’에 가까운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게 그 인물의 해피엔딩이라는 식 말이다. <어둠의 속도>는 그런 생각에 물음표를 던진다. 루는 자폐인이다. 그가 사는 근미래에는 태아나 영아기 때 모든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루는 자폐인이 가진 독특한 패턴 분석 능력으로 대기업에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루와 루의 동료들은 회사에서 독립된 사무실과 주방 시설, 운동 기구와 음향 장치 등을 제공받고,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새로운 자폐증 치료 실험을 권하고, 루는 갈등에 빠진다.
엘리자베스 문은 순수하고 솔직한 주인공 루를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리는데, 그 매력이라는 게 자폐라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어서 그가 달라지는 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지만 현재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른 생활환경이 등장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중심은 사람이라는 데 이 책의 매력이 있다. 억지 감동이 아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 솔직한 눈물을 흘리게 될 만한 영화로 거듭날 수 있다면 좋겠다. 주인공 루는 몇년 뒤의 유승호군이 연기하면 어떨까. /이다혜
불륜과 연쇄살인이 만났을 때
<얼어붙은 섬> 곤도 후미에 지음/ 시작 펴냄/ 장르 멜로, 드라마, 미스터리
불륜+연쇄살인+반전. <얼어붙은 섬>은 일견 자극적으로 보이는 설정을 모아 처절한 연애담을 이야기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외딴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여자, 불륜상대의 배우자 등을 포함한 이상한 일행 구성. 술취한 밤 짝짓기는 이전과 다른 식으로 이루어지고, 날이 밝아오자 일행은 기묘한 밀실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얼어붙은 섬>은 심리드라마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 차이가 마지막 두번의 반전을 낳는다. 등장인물의 시선, 관점에 따라 보는 이의 판단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누가 범인일까 하는 문제만큼 인물들을 괴롭히는 건 상대의 마음이다. 통속극 여주인공 같은 여성 화자의 감상을 약간 걷어내면 꽤 멋진 외딴섬 살인극으로 두 시간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밀애> <해피엔드>를 상기시키는 데가 있는데, 한두명의 주연배우가 극 전체를 끌고 가기보다 여러 남녀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송어>를 연상시키기도. 끈적거리고 어둡고 감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다. 두번의 반전은 집요한 심리드라마에 따라붙는 멋진 덤이다. /이다혜
국민요정, 사랑에 빠지다
<시에스타> 신해영 지음/ 파란미디어 펴냄/ 장르 멜로, 드라마
소녀는 14살에 피겨스케이팅의 스타가 되었다. 소녀보다 여섯살 많은 남자는 그때부터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우연한 만남, 그리고 필연적인 재회. 이제 22살이 된 연우는 녹록지 않은 슬럼프를 겪고 있고, 승하는 유명한 스포츠 저널리스트가 되어 그녀에 관한 독점기사를 쓰게 된다.
국민요정 김연아 신드롬이 미디어를 휩쓸고 경제난에 허덕이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이때, <시에스타>는 줄거리만으로도 풍부한 이미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소설이다. 연우의 차분함은 연아의 성실함을 연상시키고, 피겨스케이팅에 관련된 이야기 진행은 TV에서 여러 번 봐 이제 익숙해진 쇼의 분위기를 그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그려 긴장감을 조성했다 풀었다 하는 점을 영상으로 잘 풀어내면 재미있을 드라마. 따뜻한 유머가 곳곳에서 빛난다. 나이와 외모 대비 지나치게 순진한 남자주인공의 비현실성이나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나 대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일일연속극 정도라는 점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부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김연아처럼 쌍커풀 없는 귀여운 미녀배우를 찾을 수 있다면 최상의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남자주인공은 이선균이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이다혜
아내가 마녀라면?
<아내가 마법을 쓴다> 프리츠 라이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장르 서스펜스, 미스터리
아내의 내조에 관한 발칙한 상상. ‘발칙’이라는 말보다 ‘불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결혼한 뒤 일이 술술 풀리는 이유가 아내의 마법 때문이라면 어떨까? 뭐, 한국 식으로 상상해보면 ‘아내가 굿을 한다’든지 ‘아내가 신내림을 받았다’같은 으스스한 제목도 가능하겠지만 그보다는 마법이 더 세련되어 보이니 그대로 밀고 나가도록 하자. ‘아내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엄마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펼치는 블랙코미디는 어떨까(아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심혜진?).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편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내의 능력에 엉뚱한 상상을 더한 이 이야기는 결혼생활에 관한 은유로도 읽혀 오싹한 웃음을 안긴다.
프리츠 라이버의 원작은 초반의 블랙코미디 같은 분위기를 지나 뒤로 갈수록 음습하고 마지막은 공포를 자아내는데, 그 분위기 전환이 매우 훌륭하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안온함 뒤에 숨은 그림자를 초현실적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특히 마법을 쓰는 아내들끼리 배틀에 가까운 힘겨루기를 하는 대목, 그리고 흑마법이 등장하는 대목은 특히 매력적이다. 할리우드에서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매혹적인 이야기다. /이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