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경력이 20년 가까이 됩니다만, 내비게이션이 생긴 건 최근의 일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승용차는 물론이고 택시까지 10대 중 7~8대 꼴로 내비게이션이 달린 것 같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 물건이 없어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길을 모르면 표지판과 지도를 보지 뭐 하는 턱없는 오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옛 후배들에게 내비게이션을 선물받았습니다. “공짜로 생겼으니 달아는 보자”는 심상한 태도로 차 안에 부착하고 작동을 시켰습니다. 한데 만족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촌스럽지만, 이렇게 좋은 걸 왜 지금에서야 알았나 하는 심정입니다.
내비게이션의 편리함을 느끼면서 가끔 상상합니다. 일과 삶에서도 이런 길잡이가 생긴다면!! “300m 앞에서 좌회전”, “고가도로 밑에서 우회전”, “전방에 연속으로 과속방지턱” 같은 GPS 길 안내가, 인생 또는 업무에 대한 훈수와 지침 하달로 코드전환된다면 듬직할 것 같습니다. 가령 <씨네21>에서 가장 오래된 코너에 속하는 ‘이주의 한국인…’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이번호까지만 연재하기로 어렵게 최종결정했습니다. 이 코너에 정이 든 독자들이 많이 아쉬워하리라 여겨집니다. 이 문제를 놓고 꽤 고민을 했습니다. 이럴 때 내비게이션이 “경로가 잘못되었습니다. 없던 일로 하고 맨 처음으로 돌아가십시오” 또는 “직진, 직진, 새로운 결정대로 눈치보지 말고 그냥 직진” 따위의 단호한 조언을 해주고 군말없이 거기에 따르는 겁니다. 지도와 표지판을 헤매는 수고가 덜어지듯, 헷갈리는 인생사의 교차로에서 손쉽게 핸들을 틀 수 있겠군요.
이번호 기획 중 그와 유사한 게 있긴 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돈 들어오면 남 빌려주지 말고 자기 앞가림부터 해야 해.” “강우석 감독은 나이 많은 사람과 동업하면 절대 안되고 무조건 어린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해.” “김지운 감독은 장군 이미지야. 장군이라면 국경으로 나가야 싸우지 않겠나. 서울이 아니라 변두리쪽으로 풀려나가야 해.” 영화감독들을 위한 역술인들의 길안내입니다. 웃음이 묻어나는 내비게이션이라고나 할까요? 새해를 맞아 <씨네21>이 재미삼아 영화인들의 점까지 보았던 겁니다.
물론 진지한 내비게이션도 있습니다. 길안내를 받았던 강우석 감독은 그 자신이 또 다른 길안내를 합니다. “먹고살기 어려워지면 무조건 재밌는 영화가 흥행이 된다. 통쾌하게 웃기든지 아니면 정말 후련할 정도로 눈물 흘리게 해주는 슬픈 영화가 흥행이 된단 말이다. 어정쩡한 액션영화는 큰일난다. 두고 봐라.” 중견 영화인들이 함께 모여 ‘집단 내비게이션’으로서의 지혜를 짜기도 했습니다. 외국영화까지 포함해 내년 개봉작 200여편을 총정리하면서 어떤 영화를 주목해서 봐야 할지도 안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호는 진지하면서도 웃기는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새해맞이 초대형 특별기획입니다. 시의성을 지닌 영화 프리뷰와 몇몇 고정칼럼을 제외하고 100여쪽을 몽땅 ‘2009 스페셜에디션’으로 꾸몄습니다. 2009년 국내외 영화계에 관해선 이 한권으로 뿌리를 뽑겠다는 마음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에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며 만들었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기획에 뭔가 영감을 받아, 흥미진진한 ‘라이프 스페셜에디션’을 과감히 시도하는 2009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