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보면 좋을까요? 한달 전 <1724 기방난동사건> 시사회장에서였습니다. 여균동 감독은 무대 인사자리에서 ‘생각없이’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다. 생각없이 즐겨달라”고 말입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생각없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한데 영화가 시작되니, 저의 반응은 역설적이었습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돼 골치가 아팠던 겁니다. 조선시대 주먹들의 아이들 장난 같은 싸움을 보면서 속으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이게 뭥미? 도대체 뭥미?’ 황당하게 전개되는 장면들을 소화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의미 강박증’ 탓으로 치부해야 할까요?
거기에 비해 <과속스캔들>은 상대적으로 편안했습니다. 설정이야 다소 억지스럽지만 ‘과속삼대’의 좌충우돌은 그야말로 ‘생각을 놓고’ 보기에 딱이었습니다. 잘 짜여진 유쾌한 코미디영화였다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합니다. 두 시간이 휙휙 지나갔습니다.
적당하게 생각할 거리를 살짝 던져주는 영화도 있습니다. 가장 최근 본 영화 중에선 <예스맨>을 꼽을 만합니다. 짐 캐리의 능란한 코미디 연기에 배꼽을 잡다가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뭔가 찡하게 남은 것 같습니다. 하루에 열번도 넘게 선택해야 하는 예스 또는 노. 영화는 저의 ‘예스생활’과 ‘노생활’을 동시에 돌아보게 했습니다. 물론 심금을 울리거나 어떤 거대한 화두를 준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콩알 만한 ‘성찰의 간식’을 툭 던졌을 뿐입니다.
영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강변하고 싶습니다. 툭 어깨를 치고 가는 영화,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영화(물론 쇠방망이 같은 충격으로 뇌진탕에 빠뜨리는 영화도 있습니다만 예외로 하고…). 누군가 툭 치고 가면 돌아봅니다. “뭐지? 누구지?”하고 말입니다. 두달 전 본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도 그랬습니다. 첼리스트가 초보 납관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일본영화는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비장하고 슬프게가 아니라, 키득키득 웃으며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죽음에 관한 어떤 거창한 철학을 얻지는 못했지만, 툭 가슴을 치는 소박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인정하자.” 개인적으로 강추하고 싶은 올해의 영화입니다.
글도, 툭 치고 가는 게 좋습니다. 주먹 쥐고 웅변을 하지 않아도, 싱거운 선소리만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날리는 글. 사람도 그렇습니다.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극을 주는 사람, 낮은 목소리나 농담으로도 충분히 나를 깨우는 사람. 충고이든 격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쓰며 올 한해 저를 툭 치고 간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한해를 마무리하며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툭 치고 간 ‘올해의 벗들’은 누구였는지….
*** 지면개편을 앞두고 여러 필자들과 작별인사를 합니다. 이번호와 다음호를 통해서 종료되는 칼럼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로 <씨네21>을 살찌워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