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에 대해 최근 나는 많은 얘길 들었다. 한데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선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 안 읽었으니까. 대신 발상 자체는 아주 흥미있으므로 그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을 한번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감히 기사를 쓰는 비평가는 거의 없다. 방 안에 틀어박혀 감쪽같이 그럴듯한 기록영화를 만들었던 사기꾼 몇몇이 이미 있었듯이, 간혹 몇몇 비평가들이 그런 사기를 시도하긴 했다지만 말이다. 그런 식으로 쓴 비평에선 문학적으로 공적할 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요즘 제작되는 영화들의 전반적 현황으로 볼 때, 약간의 경험만 있다면 마이클 베이의 영화를 보지 않고서도 그에 대해 충분히 언급할 수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거다. 한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작품에 관해 정말 신중하게 거론하기 전까지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80, 90년대에 성장한 세대는 무엇보다 소형 스크린을 통해 그들의 영화 취향을 다져왔다. 한데 영화란 분명히 대형 스크린을 위해서 제작된다. 다시 말하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만이 작품 전체를 ‘완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유명한 비평가는 비행기에서 본 영화에 대해 감히 비평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조건 아래서 과연 그가 작품을 봤다고 할 수 있는가? 옳건 그르건 간에 문제의 비평가가 그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 충분히 파악할 만큼, 또 그에 대해 비평을 쓸 수 있을 만큼 그 영화를 ‘충분히 봤다’고 느꼈다고 치자. 하지만 그건 마치 책에서 본 복사본만 가지고 하나의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객의 주의가 늘 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대작을 감상하면서도 생각이 때론 다른 곳으로 슬쩍 비껴나가기 일쑤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를 못 봤다고 할 사람은 또한 아무도 없다. 더 심각한 것. 각종 페스티벌에서 밤 12시나 아침 8시에 상영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로라하는 비평가들의 머리통들 다수가 한쪽으로 슬그머니 기우뚱하는 것을 적어도 한번쯤은 봤을 거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존경받는 어떤 비평가의 DNA를 함유한 타액이 자신의 어깨 위로 흐르는 걸 감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거기다 대담하게도 그 비평가는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비평까지 썼다나.
어쨌건 일단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린 즉시 그 영화를 바로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게 사실 아니던가. 그러다 한 일주일쯤 지나고 나서 120분 가운데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또 무엇인가. 1년 혹은 2년이 지난 뒤엔 영화 얘기를 한답시고 다소 희미해진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할 뿐 작품 전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래도 나는 <밀양>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전혀 졸지도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 속 인물들이 구사하는 갖가지 억양의 중요성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뉘앙스의 대해 나에게 길게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그런 요소들은 자막조차도 내게 제대로 번역해주지 못한 부분들이었다. 작가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미묘한 요소들을 나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 작품을 보긴 봤지만 작품 전체를 본 게 아니었다는 셈이 된다.
사실 난 그런 것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자막 없이도 이미 많은 한국영화를 봤고, 그렇게 본 작품에 대한 비평도 많이 썼다. 대사의 일부가 전혀 감이 잡히지도 않았던 적도 있었고, 나중에야 친구들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를 보고 쓴 기사들에 대해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 자막을 넣었다고 해서 나쁜 작품으로 돌변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건 나쁜 영화에 자막을 넣었다고 해서 갑자기 좋은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매한가지다. 맛없는 무 반쪽이나 맛없는 무 하나 전체나, 결국 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듯이 말이다. 결국 나는,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주 쉽지만, 한 작품을 완벽하게 봤다고 단언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요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