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의 최대 장점은, 정말 확실하게 ‘웃겨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비결은, 일종의 ‘뻔뻔함’에 있다. 영화는 현실적인 ‘그럴듯함’(plausibility)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와 영화를 아주 뻔뻔하게 인용하고 뒤섞고 비틀면서 자유롭고 귀엽게 ‘논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영화적인 ‘그럴듯함’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바로 이 점이 한때 봇물을 이루던(지금은 많이 뜸해졌지만) 대부분의 실패한 한국 코미디영화들과 <과속스캔들>이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다. 한때, 과장된 설정과 설익은 개그로 ‘잡탕’을 만든 뒤, 스스로 민망한 듯 막판에 (주로 가족애, 의리 등이 주성분인) ‘감동’ 조미료를 뿌려 더욱 짜증나게 하던 많은 ‘코미디’들이 있었다(앞에서 홍보 컨셉 운운했던 것은 <과속스캔들>이라는 제목이 그 많은 ‘코미디’들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죽 했으면, “제목 빼고 다 훌륭하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과속스캔들>은 그 ‘코미디’들만큼이나 과격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또 그것들만큼이나 ‘잡탕’이기는 하지만, 그 맛을 조화시키는 멋진 조미료 또는 개성적인 손맛이 있다.
멋진 리듬과 강약의 ‘뮤지컬 코미디’
무엇보다 멋진 것은, 매력있는 캐릭터의 창조다. 남현수(차태현) 얘기가 아니라 황정남(박보영)과 황기동(왕석현) 얘기다. 당돌함과 순진함을 나눠 가진(또는 공유하는) 이 부녀는, 말하자면 ‘30대 중반 키덜트에게 어느 날 들이닥친 재앙’인데, 놀라운 건 그들이 보여주는 ‘바이러스’ 같은 생명력(감염 능력+적응 능력)이다. 그들은 어른-애를 한편으로는 감염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적응할 줄도 아는, 일종의 애-어른이다. 그들은 이 영화의 현실적으로 ‘과격한 설정’을 영화적인 ‘그럴듯함’으로 역전시키는 일등공신이고, ‘미혼모’라는 무거워질 수 있는 모티브를 경쾌하게 뛰어넘게 만드는 지렛대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 영화의 ‘수호천사’다. 모든 것(화려한 노출신, 액션신, 그리고 그림들)이 있었지만 지루하고 밋밋하기만 했던 <미인도>의 실패는, 무엇보다 뻣뻣하기만 했던 캐릭터들에 있었다(이건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판을 만들어주지 못한 영화의 뻣뻣함에 대한 불평이다).
<과속스캔들>이 만들어낸 영화적인 그럴듯함의 세계는, 일종의 ‘뮤지컬 코미디’의 그것이다(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백스테이지 뮤지컬’이라는 영화적 자산을 창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영화 전체에 은근하면서도 감칠맛이 돌게 하는 조미료로 만들고 있다). 예닐곱번 등장하는 ‘무대 공연’의 선곡들도 내러티브 전개의 터닝 포인트로 절묘하게 사용되지만, 현수-정남-기동이라는 이 ‘과속삼대’가 주고받는 ‘티격태격’의 대사들과 연기 또한 멋진 리듬과 강약을 갖춘 일종의 ‘뮤지컬 넘버’였다. 사실 ‘뮤지컬 코미디’는 일종의 ‘뻔뻔함’을 자신의 무기로 하는 장르이고, 때로는 그 ‘뻔뻔함’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스스로의 ‘퇴행성’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의 정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장르다. <과속스캔들>에 미혼모가 마주쳐야 할 현실적 난관들에 무관심하다는 혐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미혼모에 대한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서(또는 윤리적 태도)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또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미인도>가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참 ‘미스터리’한 현상이다. 나는 <미인도>의 성공(?)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선생>과 같은 신선했던 ‘퓨전사극’이 열어놓은 길에 ‘무임승차’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200만 속에 많은 실망과 불평이 있었다면(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것은 곧 ‘장르’의 쇠퇴를 의미한다. 한때 화려했던 ‘한국형 코미디’라는 장르는 그런 과정을 거쳐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과속스캔들>의 작은 성공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올 한해 영화(특히 코미디영화) 보며 웃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한국 코미디영화, 이만큼만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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