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거장’이라면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는가. <탑>을 위시한 작품이 실린 초기 단편집을 생각하며 “황석영”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테고, 90년대 대학가에서 연애할 때 단골로 등장하던 이름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입시준비생이라면 가장 만만한 이름 “오 헨리”를, 머리 희끗한 왕년의 문학도라면 “모파상”을, 독서 트렌드에 예민한 독자라면 “레이먼드 카버”를. 나이와 경험, 그리고 시대 분위기에 따라 기억하는 이름, 아끼는 이름이 다르다는 말이다. 존 치버라는 이름을 낯설어하는 독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가 위치하는 지점은 문학적 지형도에서 레이먼드 카버 곁이다. 레이먼드 카버와 술친구였던 그는 미국 단편소설 중흥기를 열었다. 하지만 시대적, 물리적 가까움과 달리 두 작가의 단편소설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치버는 정서적인 추락의 풍경을 그 누구보다 잘 그릴 줄 아는 작가다(레이먼드 카버는 유명한 몇몇 단편에서 잊을 수 없는 정신적 고양의 순간을 안겨준다는 점을 상기하자).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곤 했던 그는 기대에서 오는 좌절을, 희망만이 낳을 수 있는 절망을 그렸다.
그 유명세에 비하면 도대체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던 작가인 치버의 책이 무려 6권이나 동시에 번역되어 나왔다. 치버에게 퓰리처상(1979)과 전미 도서상(1982), 전미 비평가협회상(1982)을 안겼던 ‘존 치버 단편선집’은 4권으로 선을 보이는데 <사랑의 기하학>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기괴한 라디오>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가 그 책들이다. 장편소설인 <왑샷 가문 연대기>와 <왑샷 가문 몰락기>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치버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건 교외의 일상이었다. 배운 사람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마치 매일 걸레질하는 유리 찬장처럼 반짝거리는 중산층의 삶이 도마에 올랐다(<사랑의 기하학>에는 제목부터 <많이 배운 미국 여성>인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마치 기름칠 잘된 기계처럼 순탄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빛바래고 유행 지난 영화 포스터처럼 변해가는 과정은 무심하고 유머러스한데,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뜻밖의 상황 전개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야기 구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문학 교본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책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