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고치기 힘듭니다. 제가 아는 한 대선배는 이야기의 단락이 끝날 때마다 꼭 이런 말을 뒤에 붙입니다. “어 정말! 정말로!” 누가 거짓말이라 의심하지도 않는데, 반드시 강조의 추임새를 스스로 넣어야 직성이 풀리나 봅니다. 한 시간 이야기하면 ‘어 정말로!’가 정말 열번 정도 나옵니다. 10년 전에 그랬는데,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더군요. 17년 전에 다녔던 옛 직장의 상사는 직원회의 시간에 열변을 토할 때마다 ‘소위’를 남발했습니다. 중요한 단어만 나오면 그 앞에 강렬한 악센트를 주며 ‘소위’(소위 계급 말고 ‘이른바’의 한자어)를 찍어누르듯 발음한 뒤 한 박자 쉬곤 했습니다. 20분 열변에 ‘소위’가 20번은 나왔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선배는 회의시간에 문어체로 장황하게 말하는 게 특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광팬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이 ‘불구’가 되는 듯 살짝 불편했습니다.
글에도 일정한 버릇이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읽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병주 선생의 대하소설 <지리산>을 떠올려봅니다. 중요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이런 문장으로 끝나던 게 생생합니다. “달빛만이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분단의 아픔과 지리산 빨치산들의 고투를 그린 소설이었죠. 중요한 이야기의 매듭이 지어질 무렵이면 깊고 고요한 산중의 어둠과 적막을 전하면서 달빛, 그것도 항상 교교한 달빛으로 비장하게 마감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지리산>은 ‘교교한 달빛’입니다. 이에 반해 공지영의 초기작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는 ‘담배’로 각인됩니다. 담배를 막 끊고 난 직후여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등장인물들이 고민과 갈등에 빠질 때마다 “그(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또는 “긴 연기를 내뿜었다”로 묘사되는 풍경 때문에 “확 나도 담배를 다시 피울까 말까” 안절부절못하던 추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언젠가는 제 글의 버릇을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 쓴 작은 인터뷰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90%의 글이 “~라고 말하며 그(그녀)는 활짝 웃었다”로 끝난 겁니다. 한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야릇하고 신기했습니다. 이렇듯 글쓰는 이들마다 조금씩 습관이나 패턴이 존재합니다. 예전에 데스킹을 한 후배들의 기사 역시 가지각색이면서 일관된 특징이 있었습니다. 글의 첫 문단을 늘 “~해야 마땅하다”로 단정하듯 끝낸다거나, 유명 작가의 그럴듯한 한마디를 반드시 인용한다거나, 음식을 에로틱한 상상과 결부시킨다거나….
경험은 더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14년 전 친하게 지냈던 한 선배는 입만 열면 “내가 사회부 경찰 기자 때…”로 시작되는 장광설을 펴 속으로 엄청 지루함을 삭여야 했습니다. 또 다른 선배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공수부대 시절엔…”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공수의 ‘공’자만 나와도 입을 틀어막곤 했지요. 그래서인가요. 이 지면에서 “제가 시사지를 만들 때…”라는 말을 할라치면 속으로 뜨끔하고 찔리는 거지요. 이제 그만 해야지 하다가도 제 버릇, 아니 제 경험 개 못 준다고 슬쩍슬쩍 터져나오려고 합니다.
오늘은 원래 영화 이야기를 쓰려다가 아는 선배로부터 “아직도 시사지 편집장처럼 글을 쓰냐”는 타박을 받고 갑자기 심술이 생겨 어깃장을 놓듯 다른 글을 써버리고 말았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