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6일 프랑스 아비뇽에서 막을 올린 아비뇽포럼이 18일 폐막했다. 이번 포럼에선 ‘성장 동력으로서의 문화’라는 큰 주제하에 ‘문화-위기와 진보’와 ‘디지털 시대: 새로운 가치 등장과 문화’라는 두 가지 토픽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프랑스 총리 프랑수아 피용과 프랑스 문화통신부 장관 크리스틴 알바넬을 포함한 7개국 문화부 장관,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디자이너 필립 스탁, 미국영화인협회 회장 댄 글릭먼, 우주항공산업 다소 그룹의 로랑 다소, 장 마리 콜롱바니 전 <르 몽드> 발행인, 에르 루에트 AFP통신사 사장 등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인, 경제학자, 미디어 전문가 등 300여명이 모여 문화와 경제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재고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에서는 국회 문화방송위원회 소속 정병국 한나라당 의원과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처장이 공식 초청받았다.
아비뇽포럼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문화다양성협약(정식 명칭은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화다양성협약은 세계무역기구 WTO의 출범 이후 다자간투자협정이 문화와 같은 비무역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며, 2006년 3월 30개국이 비준을 마침으로써 발효되었다. 그리고 아비뇽포럼은 12월15일 문화다양성협약의 세부 실행계획과 지침을 마련하는 회의를 앞두고, ‘성장 동력으로서의 문화’라는 주제아래 개최되었다. 이는 “세계 경제가 위기인데 문화가 웬 말이냐”라는 질문을 무색게 하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문화예술인들만의 자축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각종 재계 주요 인사들까지 한데 모여서 경제 위기를 돌파하는 중요한 탈출구로서의 문화를 살피는 자리가 된 것. “문화가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에 “밥 먹여줄 수 있다”라는 답을 당당하게 내미는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장차 스크린쿼터 무위로 돌릴 수도
아비뇽포럼의 주제는 크리스틴 알바넬 장관의 개회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장관은 “문화다양성이란, 부를 창출하지 못하고 끝없이 지원만 해주어야 하는 밑 빠진 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아직 많다”면서, “문화적 투자가 다양성을 보호하고 시민 가치를 지켜줄 뿐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의 부를 축적시키고 그 나라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높여주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번 포럼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포럼에 참석했던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처장은, 이같은 원론적으로 ‘옳은’ 발언 이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전자상거래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전세계적으로 규정이 통일되지 않은 전자상거래와 그를 통해 전달되는 문화 콘텐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가 비밀스럽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문화다양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2천년간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니켈 디스크에 전세계 1200종류의 언어 자료를 담아, 10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소멸될 가능성이 큰 소수민족 언어들을 보존하려는 ‘로제타 프로젝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원칙적으론 불가능하다. 현재 방송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융합 속도에 따르면, 인터넷과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 등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실시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시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 콘텐츠를 감추고 있을 수도, 감춰서도 안되는 전면적 개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측면을 악용할 수 있는 부작용 역시 분명 존재한다. 양기환 사무처장은 “전세계적인 망을 통해 일국의 문화만이 배급되고 유통됨으로써 문화가 표준화될 수 있다는 부작용”을 전제하면서, 현재 미국쪽에서 추진 중인 전자상거래의 개념을 그 핵심으로 들었다.
전자상거래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인터넷은 장차 10년 내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새로운 시장으로 전면 개편될 것이다. 양기환 사무처장의 말에 따르면, 이 개념이 아직까지 추상적인 이유는 전세계적으로 규정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전자상거래의 규칙이 있고, EU와 WTO와 유네스코가 이야기하는 전자상거래가 아직까지 중구난방 다르다. 가장 먼저 선두를 치고 나온 미국의 경우, “전자적 수단에 의해 유통되고 저장되며 소비되는 모든 것들을 전부 전자상거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최근 미국은 많은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전자상거래를 별도의 장으로 다루고 있다. 디지털 상품 등 전자수단을 이용한 서비스의 공급에 관련하여, 타국에게 관세장벽 철폐 등이 포함된 ‘내국민 대우,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이같은 속셈이 특히 한국영화계에 두려운 까닭은, 장차 닥쳐올 극장 환경의 변화를 상상해볼 때 명백해진다. 관계자들은 10년 내로, 할리우드의 개봉작 디지털 버전을 위성으로 쏘아올리면 전세계에 퍼진 다른 극장이 그것을 받아 시차 없이 바로 상영하는 시스템이 자리잡을 것이라 예측한다. 어떤 규제도 없이 이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스크린쿼터는 더이상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자국의 영화산업은 할리우드영화의 직격탄을 실시간으로 맞는 상황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방송, 음악 등 시청각 서비스는 미국의 독점에 완전히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라고 양기환 사무처장은 말했다.
비준 못한 한국, 12월15일을 기억하라
오는 12월15일에는 문화다양성협약 비준까지 마친 전세계 93개 국가 중 대륙별로 구성된 16개국 정부간위원회가 모여, 협약의 세부 실행계획과 지침을 마련하는 중요한 회의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여기엔 물론 전자상거래에 관한 협약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회의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영화, 방송, 음악 등을 포함한 10년 내 시청각 서비스 분야의 국내 점유율이라든가 독자적인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참석하지 못한다. 왜? 간단하다. 한국은 문화다양성협약 비준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5년 제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을 채택했을 때 한국 역시 찬성표를 던졌지만, 2007년에 이르기까지 국내비준 자체는 미적거리고 있었다.
문화다양성협약 조항 중 ‘국가적 차원의 당사국 권리’에 관한 6조, ‘문화적 표현 보호를 위한 조치’에 관한 8조, ‘시민사회의 참여’를 확언하는 11조, ‘다른 협약과의 관계 상호 지원성, 보완성, 비종속성’을 지키는 20조, 당사국 사이의 분쟁 해결에 관한 절차를 정리한 25조가 모두 문젯거리였던 것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20조와 25조는 당시 진행 중이던 FTA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즉 FTA를 포함한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려는 목적의 문화다양성협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20조를 유보하고 25조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혔으며, 심지어 2007년 17대 국회에서 외교통상부 주도로 20조와 25조를 유보한 채 국회비준이 아닌 대통령 의결로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유보되었다. 지금까지도 문화다양성협약에 관한 국내 비준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해 국정 감사에선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과 민주당 천정배 의원 등이 유인촌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조속한 시일 안에 유보 없는 협약의 국회비준을 약속받았다. 아비뇽포럼 참가 직전에도, 정병국 의원은 다시 한번 유인촌 장관에게 ‘예스’라는 답을 듣고 왔다고 밝혔다.
양기환 사무처장은 12월15일 프랑스에서 열리는 정부간위원회 회의에 참여허가를 받은 상태다. 문화다양성협약 11조에 따라 정부간위원회에는 시민사회의 참여가 반드시 요구된다. ‘문화다양성 한국연대’에 포함된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언론노조, PD연합 등이 문화다양성협약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의결권은 없지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는 있다. 우리는 12월15일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다양성협약의 첫걸음은 이날부터 시작될 것이며, 한국 역시 비준을 마치는 대로 이 협약의 세부실행조항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시아 쪽에서는 인도와 중국이 이번 정부간위원회에 참석한다.
미국, 문화다양성협약에 가입할까
오바마는 부시와 다르다?
2005년 문화다양성협약 채택 당시,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었다. 철저하게 자국 중심적 정책을 고수했던 부시 행정부에선 당연한 결과였을 터.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직후, 그동안 교토의정서(온실가스 감축목표에 관한 의정서) 비준을 거부해왔던 미국 측 태도를 바꿀 것임을 천명했다. 더이상 미국 패권주의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고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녹색 성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태도를 밝힌 것. 이를 본다면, 문화다양성협약에 관해서도 미국쪽 태도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가능해진다.
양기환 사무처장은 사견임을 전제하며, 아비뇽포럼에서 나누었던 미국영화인협회 회장 댄 글릭먼과의 대화로부터 변화의 조짐을 유추해볼 수 있었노라고 전했다. “부시 정부에서는 문화다양성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다양성을 존중한다. 다만 문화다양성협약이 보호무역이나 시장진입 장벽이 되는 것을 우려할 뿐이다”라고 발언했다는 것. 양기환 사무처장은 이같은 글릭먼의 발언은 지난 2006년 무렵의 태도에 비해 무척 유연해진 것이라 평가하며, 미국 역시 조만간 문화다양성협약에 새롭게 가입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관측을 조심스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