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된 과거: 두 번째-1930년대 조선영화 모음> 1936~39년 감독 양주남, 서광제, 안철영 상영시간 167분 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 음성포맷 DD 2.0 한국어(일부 일본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한국영상자료원(3장) 화질 ★★ 음질 ★☆ 부록 ★★★☆
사람마다 근대성의 개념을 다양하게 해석한다. 우리는 종종 ‘자본주의의 발달, 산업의 성장, 도시의 형성, 서구 문화의 흡수’같이 외양과 수치로 근대를 파악하지만, 진정한 근대성은 의식과 정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봉건질서의 붕괴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굴레로부터의 자유 없이, 수치의 무게에 짓눌리고 물질적, 외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경향은 근대의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부끄러움 없이 날뛰고,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예찬이 인권 유린의 역사를 덮어버리며, 서구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인가. 1930년대 중·후반의 조선영화를 두눈 부릅뜨고 봐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일본이 조선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착취하는 상황은 영화산업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그것은 정신에 가한 폭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가 조선영화에 가한 부당하고 악독한 처우를 비판함과 동시에 단추를 잘못 끼운 근대의 형성기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스스로 잔존한 식민의 상황과 열등감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발굴된 과거: 두 번째-1930년대 조선영화 모음>에 수록된 영화- <미몽> <군용열차> <어화>에서 먼저 주목할 부분은 목을 죄는 군국주의에 조선 영화인이 대응했던 방식이다. 근대와 전근대의 보편적 갈등을 다룬 <미몽>과 <어화>는 고사당한 채 조선영화의 완성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친일 어용영화의 시발인 <군용열차>는 1940년 이후 조선영화의 암흑기를 예언했다. <군용열차> 중 일본인 간부의 대사- “조선 철도는 평상시 반도 번영의 대동맥의 지위에 있지만, 유사시엔 국가방위의 제일선에 선다”- 는 식민지 근대화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목숨을 버리는 조선인의 대사- “자네가 군용열차를 운전하는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이때, 내 혼이나마 선로를 지켜 황군의 무운을 기도하겠네”- 는 카프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감독 조광제가 변절을 선택한 수치스런 상황을 반영한다.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 과정에서 희생되는 인물들이다. 세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목숨을 끊거나 자살을 시도하는데, 그들이 극복할 수 없다고 여긴 현실은 70년의 시간이 흐른 작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미몽>의 일탈하는 주부 이야기는 20년 뒤 <자유부인>에 재등장하고, <어화>에서 도시로 간 시골 여자의 이야기는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단골소재였으며, 영화 속의 다양한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 계급과 빈부격차의 문제, 도시와 시골의 간극, 향락적인 문화와 소비에 연연하는 라이프스타일, 천박한 교양 수준은 거의 그대로이니 우리는 근대가 형성되던 시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계몽의 노력이 계속된다 한들 내면의 변화와 주체의 자율성이 없는 한 근대성은 여전히 타자의 영역이다.
이번 박스 세트에 포함된 세 영화는 ‘중국전영자료관’에서 수집한 것으로서 제작시기와 보존상황 탓에 영상과 소리가 열악함은 어쩔 수 없다. <미몽>의 복원 전 판본(48분)과 비교영상(3분), 러시아의 필름 아카이브인 ‘고스필모폰드’에서 수집한 <심청>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어화>의 일부 영상(35분), 해설책자 등으로 구성된 부록은 일반인과 연구자에게 공히 흥미롭고 요긴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