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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왈츠’를 기억하라 <바시르와 왈츠를>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의 접목으로 82년 레바논전쟁을 추적한 아리 폴만 감독의 <바시르와 왈츠를>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묘한 영화다. 아리 폴만 감독은 어머니와 아이를 포함한 3천명의 무슬림이 이스라엘 군부의 비호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개인적인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애니메이션인 학살의 증언이 가능한 일일까. 사실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환상을 창조하는 그릇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조화롭게 왈츠를 출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리 폴만 감독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통해 흥미로운 영화적 왈츠를 안무해냈다. 정치적으로 논쟁적이고, 형식적으로 전복적인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을 탐험한다.

오리 시반: 대학살에 대한 자네 관심은 그 사건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른 학살에서 비롯된 거라고. 사실 ‘다른’ 수용소가 그 밑바탕이 된 거야. 자네 부모님도 수용소에 계셨었나?

나:

오리 시반: 아우슈비츠?

나: 응.

오리 시반: 그러니 대학살이란 (문제는) 여섯살 이후로 자네와 함께해온 거야. 자넨 그런 학살과 수용소(라는 문제)들을 통과하며 살았던 거고. 해결책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수밖에 없어. 사람들을 찾아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있었는지 물어봐. 상세하게 들어보라고. 그러다보면… 자네가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될 수도 있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중에서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억과 망각의 이중무다. 1982년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와 샤틸라 두 지역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의 기억을 독특한 방식으로 길어내는데, 흥미롭게도 이 기억에 관한 영화는 감독 아리 폴만 개인의 망각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당시 레바논에 주둔한 이스라엘군 중 한명으로 그곳에서 벌어진 많은 참사를 목격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의 많은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리 폴만은 이 이상한 경험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레바논의 강성 기독교도인 팔랑헤 민병대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어린아이, 노인 가리지 않고 무슬림을 학살하고 있을 당시 몇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그 광경을 지켜본 영화 속 주인공 ‘나’. 2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친구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레바논의 한 마을에 진입하기 위해 죽였던 26마리의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자주 꾼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던 주인공 ‘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는다. 친구와 다르게 그 자신에게는 그때의 일이 상처로 남아 있기는커녕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말소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있을까. 왜 그런 거대한 망각의 늪이 내 머릿속을 차지했을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나는 무엇을 본 것이며 무엇을 잊은 것일까. 영화감독인 영화 속 ‘나’는 마침내 레바논에 함께 있었던 자신의 동료와 그 밖의 증언자, 조언자 등을 찾아나선다. 나의 기억을 애타게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신의 ‘이상한 경험’을 영화로 만들다

2008년 칸에서 처음 선보였을 당시 <바시르와 왈츠를>은 큰 호평을 얻었다. 특히 아우슈비츠 문제를 원죄처럼 공유하는 유럽인들에게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중심을 차지하는 이 영화가 크게 호소력을 발휘했으리라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단지 소재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범하다 말하기는 힘들어도 <바시르와 왈츠를>은 명민하고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이다.

무엇보다 제작방식에서 감독 아리 폴만은 독창성을 발휘했다. 어떤 이유로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아리 폴만이 애니메이션 작업에 손을 댔던 것인가. <바시르와 왈츠를>은 1962년에 첫 작품이 나온 뒤 이스라엘에서 나온 두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이 믿기지 않는 기록에도 <바시르와 왈츠를>은 완성도 면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여기엔 어떤 열악함이 있긴 했다. 그걸 감독은 재치있게 호소한다.“어떤 사람들은 Q&A 시간에 영화 속 인물들이 느리게 걷는 건 그들이 정신적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이 늦게 걷는 건 (정신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예산이 적어서라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한장 한장 전통적으로 그려내는 컷아웃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그들의 더 정교한 움직임과 실제적인 속도감은 다 돈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었던 아리 폴만이 열악한 작업 조건을 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생각을 했던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애니메이션과 접목시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보자는 것이었다.

영화에는 9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꿈속에서 개에게 매번 쫓긴다는 ‘나’의 친구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 ‘나’의 정신적 외상을 상담해주는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오리 시반, 지금은 네덜란드의 조용한 마을에 칩거하며 사는 옛 동료 카미 크난,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나 부대로 귀환했던 로니 데이즈,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기관총을 난사한 적 있던 ‘나’의 룸메이트 슈뮤엘 프렌켈, 또 다른 정신치료 상담자 제하바 솔로몬 교수, 그리고 용감무쌍하게 전장의 소식을 알리던 텔레비전 기자 론 벤 이샤이와 당시 탱크 부대 책임자 중 하나였던 드롤 하라찌 등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나’라는 인물.

카메라 앞에 서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이들

대개는 실존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아리 폴만은 일단 실존 인물들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여 카메라를 동원하여 인터뷰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앞에 서기를 끝까지 저어했던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와 카미 크난은 각각 두명의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아리 폴만은 “9명 중 7명은 실제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2명은 발명됐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부러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그 인터뷰 영상을 다듬어 편집했고 몇개의 극중 대화장면도 촬영했다. 그 다음 영상자료를 기초로 심화된 시나리오 작업을 한 뒤 애니메이션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실존 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의 인물들로 바뀌고, 성우들에 의해 목소리가 입혀졌다. 그러니까 실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인물들을 인터뷰한 뒤, 혹은 그게 불가능하면 배우들로 하여금 인터뷰를 바탕으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시킨 뒤, 그 영상 증언을 토대로 전체 극화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짜내는 방식으로 나아간 셈이다.

때문에 어떤 이들이 <바시르와 왈츠를>에 관해 말할 때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애니메이션 <스캐너 다클리>와 비교하며 이것도 로토스코핑(실사로 촬영한 뒤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전환 출력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물을 때마다 이 영화의 총감독 아리 폴만과 애니메이션 감독 요나 굿맨이 발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들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실사 화면 위에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입혀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다큐멘터리처럼 한번 만들어진 다음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져 나온 이중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 폴만이 중요하게 여긴 건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바탕이되 어떻게 애니메이션의 무한한 표현력으로 그 설득력을 확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어두운 과거를 취재하고 그것에 대한 기록을 이야기로만 표현한다면 아마 무척 지겨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반드시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렇게도 말한다.“당신은 이 영화에서 잃어버린 기억·꿈·잠재의식 그리고 전쟁·마약·잃어버린 사랑을 볼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 꿈… 잠재의식… 아리 폴만은 그것을 다큐멘터리로는 표현하기 힘들어도 애니메이션의 보완을 통한다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더 사실적으로, 더 환상적으로

<바시르와 왈츠를>의 매력이 여기 있다. 인물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그 증언이 곧 비주얼로 바뀌는데, 다큐멘터리 화면으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환상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대체로 애니메이션으로만 가능한(혹은 실사영화라면 엄청난 예산이 들어야 가능한) 초현실적 이미지들로의 확장, 그 슈퍼 표현력의 획득이라는 점에 <바시르와 왈츠를>의 성취도가 있다.

예컨대 이런 장면들. 카미 크난이 전장으로 가던 첫날. 그 이름도 아름다운 러브보트에서 뱃멀미에 고생하던 그는 잠깐 잠이 들고 꿈을 꾼다. 저 멀리서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배 위로 올라온다. 보니 엄청난 거인이다. 카미 크난은 배를 떠나 그녀의 몸에 아기처럼 안겨 바다를 유영하고 그때 러브보트는 폭발한다. 혹은 ‘나’가 우연히 보게 된 베이루트 공항. 처음에는 활기차고 세련돼 보이지만 순간 환상에서 깨어나고 나면 이곳은 폐허다. 시계는 멈춰 있고 비행기는 불타 있다.

특히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제목을 선사한 시가지 전투장면은 아이러니하다. 룸메이트 프렌켈이 적과의 대치 중 영웅 심리를 참지 못하고 다른 동료의 기관총을 빼앗아 전장 한복판에 뛰어나가 난사할 때의 장면. 그때 그는 기관총의 거친 반동으로 마치 왈츠를 추듯 종종거리면서 주변을 뒷걸음치며 돌아다니게 되고 음악도 그렇게 깔린다. “그 왈츠장면은 전시에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려 사용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관총을 난사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그걸 말할 수 있을까? 2초? 10초? 30분? 그 기관총과 함께 시간은 멈춘 것이다.” 감독은 그때 기억의 문제를 시각화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그때 들려오는 ‘나’의 내레이션은 이렇다. “그는 교차로를 건너가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진 듯 춤을 추고 있었어. 적군을 저주하며 거기 영원히 있을 것 같았지. 포격 한가운데에서 왈츠 솜씨를 과시하는 듯했어. 머리 위에 바시르의 포스터가 보였지. 바시르의 추종자들은 200m도 안된 곳에서 복수를 준비했고. 그게 바로 사브라와 샤틸라 대학살이야.”

바시르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와 연관을 맺은 역사적 인물이다. 또한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제목은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동맹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박스 기사 참조). 마침내 <바시르와 왈츠를>은 마지막 장면에서 바시르라는 정치적 인물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어떤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는지를 짧지만 고통스러운 동영상을 덧붙여 보여준다. 아리 폴만은 가편집본 다큐멘터리를 한편 완성하고 그걸 바탕으로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되,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는 충격적인 실사 화면을 덧붙여 마침내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의 접목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정리하고 있다.

왜 ‘깡그리 망각’은 되풀이되는가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오리 시반은 ‘나’에게 충고한다. “대학살에 대한 자네 관심은 그 사건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른 학살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러니 대학살이란 (문제는) 여섯살 이후로 자네와 함께해온 거야. 자넨 그런 학살과 수용소(라는 문제)들을 통과하며 살았던 거고.”

이 문제가 실은 가장 중요하다. 4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온갖 종류의 고문과 도륙으로 죽어간 그날 이후 몇 십년이 흘러 기독교를 따른다는 레바논의 팔랑헤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하는 역사의 불운이 이어졌다. 그걸 옆에서 목격한 유대인의 자손이자 이스라엘의 한 병사이자 참혹한 학살의 동조자로서의 ‘나’는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 그러니까 망각은 어떤 식으로건 계속되는가. 언젠가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기억을 덮어버렸고, 아옌데의 암살은 방글라데시의 신음 소리를 가라앉혔으며, 또한 시나이 사막의 전쟁은 아옌데 사건을, 캄보디아 대량 학살은 시나이 사막의 전쟁을 잊게 했다. 이러한 식으로 매사는 계속되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망각할 때까지 되풀이된다.”(<웃음과 망각의 책>) 그러니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을 깡그리 잊었던 영화 속‘나’의 망각의 경험도 사실은 전쟁의 외상 때문이 아니라 이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 ‘나’가 그렇게나 애타게 기억을 찾아 나선 것도 그에 대한 죄책감은 아니었을까? 역사는 반복된다. 슬프게도 망각의 역사로. 알고 나면 충격적인 기억의 역사로. <바시르와 왈츠를>이 전하려는 바다.

사브라-샤틸라 사건

3천명을 학살한 팔랑헤의 복수

1982년 9월16일 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휴머니즘은 학살당했다.

1982년 7월. 레바논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미사일 테러로 몸살을 앓던 이스라엘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원했던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이 레바논에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색출하고 40km에 이르는 안전구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을 수장으로 한 군부세력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점령한 뒤 기독교도 수장인 바시르 제마엘(영화의 제목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것이다)을 대통령으로 앉히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1975~76년의 내전 이후 끝없는 모슬렘과 기독교도 사이의 테러로 분열된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꼭두각시 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엘 샤론의 계획은 1982년 9월14일 바시르 제마엘이 대통령 취임 9일 전 폭탄 테러로 살해당하면서 좀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바시르의 죽음에 광분한 레바논 기독교도 팔랑헤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이 포위하던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와 샤틸라로 기습해 들어간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팔랑헤 민병대의 목적이 팔레스타인군의 색출이라고 믿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군은 시리아로 거처를 옮긴 지 오래였다. 팔랑헤 민병대의 목적은 애초부터 복수였다. 그들은 사흘 동안 3천여명에 이르는 난민을 남녀노소 구분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학살극은 <뉴욕타임스> 레바논 특파원에 의해 신속하게 서방에 보도되었다.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 군부의 개입 여부가 문제시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책임자를 색출하는 위원회를 구성했고, 아리엘 샤론은 학살을 방조한 책임을 판결받아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벌어진 지 20년이 지난 2001년,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에 당선됐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공개된 직후 극소수의 서구 및 무슬림 언론은 아리 폴만의 영화가 사브라-샤틸라 학살로부터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해온 이스라엘 정부의 전형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공격했다. 이에 아리 폴만은 <바시르와 왈츠를>이 당시 사브라-샤틸라 지역에 사병으로 주둔하던 개인적 기억에 근거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변호했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자는 레바논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들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이스라엘 사병들이 학살을 직접 자행한 일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민병대들의 계획된 극단적 복수극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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