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주인공 중 한명이지만 그 누구보다 평범한 소녀다. 특별히 예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귀여움이 묻힐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다. 영민하고 재치있지만 독자를 놀라게 할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는 아니다. 좌절된 어린 시절의 소망과 소소한 행복감을 고루 버무리면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는 소녀들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아로 자라나 소년을 원했던 집에 보내져 새로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국경과 시간의 벽을 넘나드는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 100주년 기념판은 앤을 추억하는 세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루시 M.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빨강머리 앤 협회’ 100주년 공식 기념판.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빨강머리 앤 협회’가 인정한 캐나다 작가 버지 윌슨이 원작 연구를 통해 완성한 앤의 탄생 배경부터 입양 전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여기에 <빨강머리 앤>의 저자인 루시 M. 몽고메리가 손수 만든 스크랩북 <빨강머리 앤 이미지북>이 함께 나왔다. <빨강머리 앤 이미지북>은 100년 전 캐나다와 루시 M. 몽고메리의 일상을 알게 해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무엇보다 앤을 떠올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는 여자 모델의 사진이 그 스크랩북에 있을까? 앤의 모델로 알려진 이블린 네스비트가, 백만장자인 첫 번째 남편이 그녀의 옛 애인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은 앤의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뜬금없지만 네스비트의 이미지와 유사한 스타일의 모델 사진을 스크랩북에서 발견할 때의 기분은 성인이 된 앤의 모습을 상상하게 도와준다(상상보다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빨강머리 앤>을 다시 읽는 즐거움이 이번 기념판의 백미다. 매슈 아저씨가 은행의 파산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충격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대목은 어렸을 때보다 지금 더 가슴에 와닿는다! 앤의 경험적 깨달음과 진심어린 다짐은 어렸을 땐 공감의 대상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읽는 지금은 반성의 계기가 된다. “저는 어른이 되면 어린 여자애들에게 말을 할 때도 어른한테 말하듯이 대해줄 거예요. 애들이 거창한 표현을 쓴다고 웃거나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 슬픈 경험을 제가 해보았기 때문에 알거든요.” 다시 읽으면서 생기는 새삼스러운 아쉬움도 있다. 소녀들을 괴롭히던 소년들이 모두 길버트처럼만 자라주었다면 세상이 더 아름다웠을 텐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