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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히어로들을 짓밟고 해체하라
김도훈 2008-11-27

최후의 슈퍼히어로영화 <왓치맨>, 세편의 클립 공개

대런 애로노프스키, 테리 길리엄, 폴 그린그래스.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영화화에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감독들의 리스트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묘한 정신세계를 지닌 애로노프스키와 길리엄,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이 가장 신묘한 그린그래스가 못하겠다 원작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갔을 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각색이 어렵거나, 스튜디오의 간섭이 너무 심했거나, 그도 아니라면 위대한 원작을 앞에 두고 지나치게 부담이 컸거나.

앨런 무어가 쓰고 데이브 깁슨이 그린 그래픽 노블 <왓치맨>은 1986년에 출간됐다. 히어로 라이선스를 반납하고 국가의 종이나 자본의 종, 혹은 암흑의 황제로 살아가던 슈퍼히어로들이 전직 히어로의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모인다는 내용이다(알고보면 살인범은 히어로 중 한명이고, 게다가 그는 인류의 학살을 꾀한다). 문제는 이게 미국의 현대 신화로서의 히어로물을 완전히 짓밟고 해체하는 묵시록이었다는 거다. 말인즉 이걸 영화로 만들기에 1986년은 너무 일렀다는 거다. 아직 팀 버튼의 <배트맨>도 나오기 전이다. 우울증 걸린 히어로들의 자기 파괴적인 모험에 수천만달러를 투자할 만큼 정신나간 제작사는 없었다. 다만 1986년의 몇몇 여드름 난 꼬맹이들은 커서 감독이 되면 <왓치맨>을 연출하겠노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로노프스키나 그린그래스 같은 남자들 말이다. 개중에는 잭 스나이더라는 애도 있었다.

2008년 <왓치맨>의 영화화는 마침내 현실화됐다. 메가폰을 잡은 건 잭 스나이더다. <새벽의 저주>와 <300>을 만든 젊은 애송이? 맞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연출이 확정되자 인터넷의 광적인 <왓치맨> 팬들은 좀 실망했다. 길리엄과 애로노프스키의 이름이 오가던 프로젝트 아니던가. 스나이더는 영 무게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들이 11월10일 아침 10시 CGV압구정에서 공개된 세편의 <왓치맨> 클립을 봤다면 근심을 멈추고 개봉일을 기다리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개된 클립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프닝 타이틀이다. 밥 딜런의 명곡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이 흐르는 가운데 히어로들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또 몰락해가는 과정이 고생창연한 복고풍의 스틸로 소개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오프닝 타이틀이 이후 전개될 <왓치맨>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인 동시에, 미국의 현대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종의 사회적 텍스트라는 것이다. 케네디 암살, 인류의 달 착륙 등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왓치맨>의 세계관으로 재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잭 스나이더가 영화의 연도를 근미래로 설정하려던 제작사의 입김을 물리치고 원작에서와 똑같은 시간대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리처드 닉슨은 재선되고, 심지어 미국 헌법을 뜯어고친 뒤 삼선된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냉전 또한 계속된다. 그러니까 영화 <왓치맨>은 패러랠월드(평형우주)에서 진행되는 또 다른 미국의 이야기인 셈이다.

나머지 두 클립은 배트맨을 연상시키는 나이트 아울과 일종의 노출증 원더우먼인 실크 스펙터가 감옥에 갇힌 또 다른 히어로 로어셰크를 구해내는 액션장면, 그리고 닥터 맨해튼이 우연한 사고로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때문에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몽타주다. 아직 CG 작업이 완성되지 않은 관계로 골수팬들이 기다리는 ‘아울쉽’(나이트 아울이 타는 일종의 비행정) 장면은 움직임과 디자인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300>에서 보여줬던 잭 스나이더의 비주얼리스트로서의 면모, <300>의 스턴트 코디네이터 데이먼 카로가 힘을 빌려준 액션장면의 역동적인 힘은 짧은 클립에서도 충분히 효력을 발휘한다.

잭 스나이더는 <300>에서 그랬듯이 원작의 주요한 장면들을 거의 오려서 붙인 것처럼 그대로 화면에 옮긴 듯하다. 그러나 <300>은 짧은 모험담이다. 반면 <왓치맨>의 원작은 히어로들의 가상 신문 기사와 다이어리, 서브 텍스트가 혼재된 열두개의 챕터가 독자의 지적 모험심을 약올리는 작품이다. 원작의 복잡한 가지들을 쳐내고 중심 줄거리와 주요 스펙터클을 재연하는 것으로 앨런 무어의 비범하게 뒤틀린 서사시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년 3월5일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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