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무어가 <눈먼자들의 도시>의 여주인공을 맡게 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맹인을 가장하고 수용소로 들어가는, 거기서 조금씩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엘리트 여성을 무어만큼 잘 소화할 여배우는 거의 없다. 올해 칸에서 첫 공개됐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눈먼자들의 도시>는 비평적으로 상반된 반응을 얻어냈다. 영화화 불가능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사라마구의 철학적 묵시록을 영화화하려면 그 정도 반응은 참고 넘기는 담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줄리언 무어의 연기에 딴죽을 걸고 넘어진 비평가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녀는 여전히 훌륭한데다 심지어 사상 최초로 금발로 염색까지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줄리언 무어와 서면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걸 꼭 물어보고 싶더라.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금발로 염색한 이유가 뭔가. =영화에서 ‘Blindness’를 ‘White Sickness’라고 한다. 병에 걸리면 세상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영화도 거의 흰 톤이다. 그래서 거슬리지 않을 만한, 피부색과 비슷한 색으로 선택했다. 특이한 소수이기보다 다수의 평범한 아내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또 머리 이야기다. 당신은 영미권 영화계에서도 보기 드문 빨간 머리다. 혹은 금발 머리로 염색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빨간 머리 여배우다. 빨간 머리가 당신의 캐릭터 혹은 영화배우로서의 가치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나. =어렸을 땐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싫었다. 음료수 이름인 ‘Freckleface Strawberry’(주근깨 얼굴 딸기)가 어렸을 때 별명이었다. 빨간 머리를 특별히 고집한 적은 없다. <눈먼자들의 도시>로 처음 염색을 했을 땐 금발 머리도 썩 괜찮다는 생각을 했지만 금세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고 약간 특이하다는 것 역시 삶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사라마구의 원작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원작은 오랫동안 영화화가 불가능한 책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원작 소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큰 주제를 담고 있다. 이렇게 포괄적인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시각적인 영상으로 옮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앞에 놓여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일정 부분 무시하고, 모르는 척하고, 듣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원작에선 미래를 바라보며 예견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라고 한다.
-메이렐레스 감독이 당신에게 요구했던 것은 뭔가. 그에 더해 당신이 영화를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감독이 당신을 원했나. =우린 서로가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난 그의 시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이 어려운 소설을 자신의 관점에서 훌륭한 시나리오로 바꿨고 표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에게는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굉장한 힘이 있다. 서로의 능력을 믿고 있어서 특별히 요구한 것은 없었다.
-박사의 아내는 절망으로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이라도 끝까지 견뎌내며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인가. =내가 맡은 캐릭터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남들과 달라서 맹인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저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이 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 누구 중 한명일 것이다.
-강간장면은 책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대단히 고통스럽게 가슴을 후벼판다. 촬영장에서의 긴장감은 어땠는가. =언제나 성에 대해, 성적 소수자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수치심과 멸시감을 느끼는 점이다. 이것이 과연 동물적인 것인지 사회적인 것인지 늘 고민한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모두 다 전문가들이지만 이 장면에서는 많은 스탭들이 함께 고통스러워했다. 모두 가슴이 무거웠다.
-당신은 인디펜던트 영화와 아트하우스 영화, 상업영화를 절묘하게 오가며 활동한다. 작품을 선택하는 당신만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왜 이야기하려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답을 나 역시 얻으려 한다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
-당신에게 주로 주어지는 캐릭터가 몇개 있다. 강인한 정부요원 혹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중년 부인 말이다.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타입 캐스팅(Type-casting)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대체 어떻게. =일반적인 외모와 말투,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많은 사람들이 객관화해 받아들인다면 그게 바로 타입 캐스팅이다. 또한 변신이나 변화라는 말 역시 뭔가로부터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도 타입 캐스팅에서 시작된 것일 거다. 나 역시 타입 캐스팅이 있을 테지만 그것을 깨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날 타입 캐스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특정 역할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눈먼자들의 도시> 혹은 최근 <세비지 그레이스>처럼 극단적인 역할에 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아니면 당신은 그런 역할들에 도전함으로써 개인적인 치유을 경험하는 것인가. =치유라기보다는 배움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땐 캐릭터의 삶을 통해 조금씩 배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함 속에도 역시 극단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언급한 두 작품 모두 평범함 속에서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사진작가 낸 골딘의 작품들을 사랑한다는 인터뷰를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그녀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 같은 붉은 머리여서? 혹은 당신이 처절할 정도로 솔직한 인간들의 드라마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인가. =상처가 담긴 그녀의 사진에는 절망과 분노보다는 그 이후의 담담함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삶의 대한 애정이라고 하자. 그녀의 그런 점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