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눈 앞이 하얘지는’ 실명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 오직 한 안과의사(마크 러팔로)의 아내(줄리안 무어)만이 눈멀지 않는다. 길거리엔 오물이 가득하고, 굶주린 개가 죽은 자들의 시체를 물어뜯으며, 시력과 함께 이성 또한 사라진 도시는 단테가 묘사한 아홉 가지 지옥의 축소판이다. 영화는 안과의사 아내의 눈을 통해 추악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100자 평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잠시라도 시각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 능력과 직결되어 있는지. 현대인은 전체 정보의 90%이상을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하니, 내 인식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 쯤 되는 셈이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란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일대 혼란이 초래되는 사태로, 대부분 시각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시각을 배제한 새로운 감각과 인식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집단적으로 나타난다면? 그 혼란이 어느 정도일지 ! 짐작하기도 힘들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러한 혼돈의 궁극을 상정하고, 그 혼돈을 혼자서 생생하게 목격할 단 한사람을 남겨둔다. (자신을 대자화 하는) '타자의 시선'이 사라진 상태에서 충동과 욕구에 의해 추동되고, 외적 질서는 물론 내면화된 질서마저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늑대'가 되어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는 최악의 아비규환을 '차마 눈뜨고 바라봐야 하는' 주인공의 심경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영화는 수용소에서의 탈출을 거쳐 다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가 된 더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다시금 실낱같은 희망을 싹틔운다. 영화가 보여준 지옥도가 끔찍한 만큼, 그 희망의 빛은! 더욱 간절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최고의 원작에, <시티 오브 갓>, <콘스탄트 가드너>를 찍은 페르난도 메이렐러스 감독의 최고의 연출에, 줄리앙 무어의 최고의 연기가 어우러진 최고의 영화이다. 영화 <미스트>를 곱씹으며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눈먼자들의 도시>가 전하는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 역시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황진미 영화평론가
끔찍하다. 영화속의 지옥말고, 눈먼 자들이 각색한 듯한 단선적인 시나리오 말이다. 사실 사라마구가 창조한 눈먼 자들의 지옥에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걷는식물 트리피드>를 포함한 디스토피아 장르에서는 어차피 흔하고 흔한 소재일 따름이다. 사라마구의 원작이 위대한 이유는 오래된 장르적 소재로 인간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지적 성찰을 근사하게 이뤄냈다는거다(장르문학을 주류문학의 감성에 맞게 교묘하게 재포장했다고 말해도 틀린건 아니다. 이거야 뭐 남미 문학가들이 예전부터 잘해냈던 일이기도 하고). 메이렐리스의 과업은 애초부터 막대했다. 사라마구의 원작은 온갖 메타포로 가득하기 때문에 영상으로 옮기려면 뭔가 다른 수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메이렐리스는 그 `수'를 찾지 못했다. 그와 각색자는 원작의 이야기를 겨우겨우 따라가며 조잡한 영상으로 담아내다가 무릎을 꿇는다. 교훈은 이거다. 어떤 문학 작품은 영화로 손대는 게 불가능하거나, 꼭 영화로 만들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 보다 영화적인 언어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일이 필요하다는 거. 다음으로 망치고 싶은 원작은 뭔가? '백년동안의 고독'? - 김도훈 <씨네21> 기자
영화화가 까다로운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올해 본 가장 우울하며 불쾌한 폭력과 공포로 가득했다. 어느날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이들을 격리 수용 조치를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이 수용소에서 벌이는 타락과 광기의 처절한 몸부림은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하다. 인간의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힘으로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통제하며, 제멋대로 유린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현실과 많은 점에서 닮았다. 강렬한 비주얼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근래 본 적이 없는 공감할만한 미래 묵시룩의 세계를 힘있게 담아냈다. - 김종철 <익스트림무비> 편집장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화가 못내 아쉬운 작품이다. 영화는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의 충실한 요약본이기는 하지만, 매끄러운 요약에 집중한 나머지 소설의 은유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줄 영상언어에 대한 고민을 잊었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장면에 나레이션이 불쑥 끼어들어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시각적으로 좀 더 강렬해도 좋았을 장면(이를테면 병동이나 거리의 폭동)에서는 도발하지 않음으로써 <눈먼 자들의 도시>는 소설 특유의 아우라를 잃었다. ‘눈먼’ 제작진들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동안, 오직 줄리언 무어만이 든든한 연기로 이 영화를 뒷받침한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 장영엽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