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소외된 존재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호소할 데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뭉친다. 조합을 만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며 고통을 토로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다. 서울국제노동영화제는 노동자들이 개최하고 노동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영화제다.
서울의 인디스페이스(11월13~16일)를 비롯하여 수원(11월15~16일: 민주노총 경기지역본부), 대전(11월29~30일: 아트시네마), 울산(11월20~23일: 대안문화공간 소극장 품) 각지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노동영화제는 올해로 12회를 맞는다.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렌즈를 들이댄 것이 햇수로 10년을 넘겼다. 늘어난 나이만큼 바라보는 시선도 넓어졌다. 기존에도 볼 수 있었던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영화(<우리 이제 끝장내자!> <세 번째 출발> <오늘은 뭐하고 놀까?>)나 노동자 투쟁을 담아낸 영화는 물론, 여성과 이주노동자를 다룬 영화, 민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영화 등 새로운 종류의 영화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해가 갈수록 꾸준히 줄어드는 관객을 붙잡기 위한 노동영화제 나름의 노력이다.
<지금 보고 계신 거죠?>의 도발성
‘노동자계급,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영화제는 한국 노동자의 현황을 담은 영화로 막이 오른다. 개막작인 <5x5+1>은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다섯 감독이 국내 다섯곳의 노동자 궐기 현장을 촬영한 작품. KTX, 삼성백혈병대책위, 성신여대청소미화원, LIG/에이스손해사정노조의 시위를 5분에서 10분 내외의 단편 형식으로 파헤치면서 한국 노동자의 ‘여기’와 ‘지금’을 논한다. 폐막작은 보쉬-지멘스 노동자들의 파업과 행진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일 금속노조, 이상과 현실>이다. 2005년 5월 공장폐쇄 소식을 듣게 된 보쉬 가전제품회사의 노동자들이 대단위의 폐쇄 및 해고 반대 투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소외 노동자들의 대표,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관련된 국내외의 다큐멘터리들도 상영된다. <천막> <철탑> <회색도시> 등 7편의 영화는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현장을 가감없이 살벌하게 담아냈다. 그중에서도 중년 여성노동자들의 속옷 시위 장면으로 시작하는 <지금 보고 계신 거죠?>는 무척 도발적이다. 궐기에 나선 시청 청소용역 직원을 밀착 취재하면서 박광태 서울시장의 비윤리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꼬집은 작품. 로케트전기 해고자들의 위험한 고공시위와 삭발시위가 담긴 <1년간의 비망록>도 시선을 붙잡는다. 미국도 그렉 로저스의 <미국 퀵서비스 노동자들>, 옥타비오 벨라르데의 <비정규직에게 정의로움이 있을까?>로 비정규직의 실태가 한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고한다.
<터키 조선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 터키 투즐라 조선소의 노동자들을 묘사한다. 이주노동자를 다룬 <어둠 속의 등불> <사코와 반제티>, 여성노동자를 다룬 <동일임금을 위하여>는 차별 속의 차별을 이야기한다. 민주주의 투쟁과 역사적인 노동운동을 다루는 영화들도 모였다. 1929년 호주노동운동을 다룬 <락 아웃>과 운동가 유진 뎁스의 활약을 중심으로 미국 철도노조의 과거를 담아낸 <유진 뎁스와 미국 노동운동>이다. 노동운동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이다.
노동운동의 뿌리를 보여주는 <락 아웃>
이번 영화제는 노동운동 바깥의 움직임에도 눈을 돌린 점이 눈에 띈다. 다큐멘터리 <물을 둘러싼 전쟁>은 수도세를 둘러싼 정부와 주민의 대립을 묘사한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인접한 도시 하이랜드 파크의 주민들은 시에 새로 부임한 재정 관리사가 수도를 민영화하려 하자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 <미디어, 많은 진실 중의 작은 한 조각>은 2005년과 2006년 사이 멕시코 옥사카를 배경으로 미디어를 장악하려는 정부와 민중을 다룬 영화다. 한편 노동영화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켄 로치 감독. 제12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서는 그의 신작인 <자유로운 세계>가 상영된다. 켄 로치는 1964년에 데뷔한 이래 노동자들의 처지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사회파 감독이다. 영화제에 궁금한 것이 있다면 홈페이지(www.lnp89.org)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