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내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결혼할 거가? 남: 결혼은 무슨 유치하게. 피임하면 된다. 여: 실패하면? 남: 결혼은 아무나 하나. 준비를 해야지. 여: 니 준비하는 건 있나? 남: 그래, 내 나이 처먹고 빌빌대고 있다.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친구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싸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내게 한번이라도 믿음을 준 적이 있느냐.” “왜 내 말을 끝까지 안 듣느냐.” “속물처럼 얘기하지 말아라.”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야 마는 20대 피끓는 청춘의 연애 싸움. <그들도 우리처럼>의 정훈과 은림은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아프게 건드린다. 섹스가 두려운 은림을 정훈은 이해하지 못하고, 직장인 은림은 백수인 정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누가 더 속물이고 누가 더 바보 같은지, 혹은 잘못했는지 판단하는 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상상마당 8월 우수작 중 한편인 함정식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은 감독 본인의 실화를 녹여 만든 영화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3학년인 함 감독은 1학기 워크숍 작품을 찍으면서 “내 얘기, 내가 잘 아는 얘기들을 영화로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고, 싫어하는 것은 뭘까. “남녀관계”더란다. 잊고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자가 싫었다.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들을 떠올려보니까 하나같이 속물 같았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고 난 뒤 여자를 만나도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내가 만난 여자들이 유독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함 감독은 여자친구와 만나서 싸웠던 일들을 일기장에 기록했고, 그 일기장은 다시 시나리오의 밑천이 됐다. 싸우고 주고받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도 더불어 대사에 참고했다. “꽁하고 옹졸한 성격”의 함 감독은 그러나 시나리오를 발전시켜나가면서 여자를 많이 이해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영화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A4 100장 가득 반성문을 쓰라고 한다. 이 대사 역시 함 감독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그런 말 한 나도 대단하고 반성문 써온 여자도 참 대단하다. 당시 나는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고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기적인 거지. 그때 왜 그랬을까 싶다. 영화를 찍으면서 알았다.”
생생한 오리지널 부산 사투리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대사로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진다. 특이한 점이라면 모든 대사가 부산 사투리로 이루어진다는 것. 영화와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던 부산 사투리와는 다른 ‘정통 부산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오간다. “서울 생활이 3년째다. 그런데 아직까지 서울말을 못 쓰겠다. 고향이 울산인데 남자들이 서울말을 쓰면 너무 간사해 보인다. 또 사투리는 리듬이 있어 감정을 드러내기에 좋은 것 같다. 내가 사투리에 익숙하니까 연기 연출하기도 편하고. 두명의 배우는 모두 부산 출신이다.”
함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열흘 동안 배우들을 불러다가 대본 리딩 연습을 시켰다. 대사가 입에 자연스럽게 붙도록 어미 하나하나를 맞춰나갔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배우들의 대사 연기가 매끄러운 것은 그가 연기 연출에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연기 연출만큼은 잘하고 싶었다”는 그의 연출 스타일은 상황을 “정형화시키는 것”. “촬영 전에 미리 모든 상황을 맞춰놓는 게 편하다. 촬영장에서 혼란스러울 일이 없으니까. 현장에서 바꾸고 조율하는 경우가 많아지면 시간과 예산이 늘어나 부담된다.”
<그들도 우리처럼>을 찍으면서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진지해졌고, 개인적으로도 더욱 성장하게 됐다는 함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지. “바뀌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여자가 싫다.” 그렇다면 함 감독은 현재 솔로? 버젓이 여자친구가 있다. “영화 출연했던 배우들한테는 상금 다 썼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다. 조금 있으면 여자친구 생일인데 선물 사줘야 한다. 물론 스탭들한테도 한턱 쏘긴 할 거다. 막상 손에 쥔 걸 놓으려니 아쉽긴 하지만. (웃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영화처럼 앞으로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라는 함 감독의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