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는 드라이한 공포물이다. 인물들의 대사도 건조하고 질감도 까끌까끌하다. 가로등 불빛이 어둠에 묻혀버릴 만큼 캄캄한 도로 위. 연인 사이로 보이는 남녀는 그 길에 갇혔다. 지도를 찾아봐도 여기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다 불쑥 차로 사람이 뛰어들고,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이 사람을 치게 된다. 그대로 차를 몰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사건 현장을 수습한다. 그러나 여자의 귀에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결국 차를 세워 트렁크를 확인한다.
상상마당 이달의 단편 7월 우수작 중 한편인 황일빈 감독의 <트렁크>는 오로지 차분하게 쌓아올린 서스펜스로 공포심을 유발하는 영화다. 재밌는 것은 영화 속 서스펜스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논리는 전혀 없다. (웃음) 원래는 60페이지짜리 시나리오였다. 블랙코미디에 사람 목 따는 슬래셔였고. 그런데 제작을 도와주던 친구가 내가 가진 돈과 시간으로 어떻게 의도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겠냐고 하더라. 그래서 앞부분 10페이지만 찍은 게 지금의 <트렁크>다. 논리적 비약과 순환구조도 의도치 않았던 결과다.”
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뒤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둔 서른 중반의 가장이 영화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모 등에 업혀 극장 문턱을 넘었던 황일빈 감독은 자신의 첫 영화 <트렁크>를 “장르영화 공부하는 심정으로” 찍었다. 그러다보니 아쉬운 점이 많다. “원래는 크레인숏과 롱숏을 많이 쓰려고 했다. 인가도 없고 오로지 나무와 길만 있는, 탁 트인 공간이지만 또 동굴 같은 모습을 멀리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조명과 예산이 필요한지 몰랐던 거지. <트렁크>는 텅스텐 조명 하나로 찍었다.”
자신의 인생 일대 최고의 영화가 토브 후퍼 감독의 <텍사스 전기톱 학살>이라는 황일빈 감독은 “고어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쾌한 악몽 같은 느낌을 영화 전반에 불어넣는 영화”가 진짜 공포영화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트렁크>가 시각적으로 과장되거나 감정적으로 과잉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다. 황일빈 감독은 또 자신은 굉장히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우리 가족을 해친다는 상상은 너무 무섭다. 6살짜리 딸이 있는데 아이가 유괴되는 상상은 상상 자체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는 전혀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것들 말이다. 군대에서도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공동묘지 같은 데 혼자 서 있으라고 한 거였다. 고참이 괴롭히지도 않으니 얼마나 신났겠나.” <트렁크>가 본인에겐 전혀 무섭지 않은 영화라는 얘기다. 최대한 자신의 영화와 거리두기를 하면서 냉정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댔다.
“나이 드니까 두 가지가 없어지는 것 같다. 유머감각과 연애감정. 유머라는 게 교묘하게 포장된 공격성일 수 있는데 나이들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인지 유머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근데 오히려 시니컬한 유머는 늘었다. 연애에 대한 감도 사라졌다.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모르겠다. 시나리오를 쓰면 그래서 전부 불륜 멜로다. 사랑 이야기는 전혀 없고 사랑 그 주변부를 음각화하게 된다.”
황일빈 감독은 현재 단편 <바캉스>를 준비 중이다. <트렁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건조한, 멜로영화다. 평범하게 십몇년을 살아온 부부 이야기로, 대구에 출장간다고 한 남편이 청평에서 자동차 충돌 사고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이후 뚜벅뚜벅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무한 반복되는 일상을 그릴 예정이다.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인 황일빈 감독은 <바캉스> 이후에도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다. 아니 “절박하다”고 했다. “부인이 절대 영화하면 안 된다고 해서 광고회사에 위장취업했고, 십몇년을 다니다가 그만뒀다. 상상마당 우수작 선정되기 전까지 장모님은 내가 헛짓하고 다니는 줄 알았다. 그저 내년에도 취직 안 하고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서 현장으로 출근하는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