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연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58번째는 김충남이 기증한 고 김학성 촬영감독의 유품 중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반 완장입니다.
일제시대 말기인 1940년부터 광복까지는 일제 탄압의 절정기로 영화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국 영화관에서 일장기와 전쟁슬로건이 포함된 뉴스영화의 강제 상영이 시작되었고, 1938년 2월부터는 조선 지원병 모집에 부응하는 선전영화 제작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와 지원병제도 선전을 위해 조선영화 제작과 배급을 둘러싼 구조를 완전히 장악해 ‘영화신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적인 수순에 들어갔다.
1939년 총독부 도서과는 조선군 보도부와 합작해 ‘조선영화인협회’를 발족시켜 영화인을 가입시켰다. 이 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영화일에 종사할 수 없었고, 이는 1940년 2월 공포된 ‘조선영화령’의 영화인 등록제도로 이어져 영화인 통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감독, 작가, 배우, 기술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되었고, ‘기능증명서’를 발급받지 않은 영화인은 활동이 불가능했다. 영화제작사 강제통합의 내용을 담은 조선영화령이 공포된 뒤 1년의 유예기간 동안 조선영화주식회사, 고려영화협회 등 10여개의 제작사는 조선영화제작자협회를 결성해 자구책 마련에 나선다. 그러자 총독부는 영화제작의 필수요건인 생필름 배급을 협박 수단으로 삼아 이들의 노력을 무산시킨다. 1942년 5월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주식회사를 발족시켜 배급업 역시 통합하여 일제 통제하에 두었고, 같은 해 9월29일 몰수한 기존 영화사의 시설과 기자재를 기반으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법인 조영)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전부 두들겨 가루를 만들고 하나의 당고(왜떡)를 만들어야 한다”는 총독부의 말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국책영화 제작사 하나만 존재했던 것이다. 법인 조영은 <조선해협>(1944), <병정님>(1944), <젊은 모습>(1944), <사랑의 맹서>(1945) 등을 포함한 10편의 극영화와 다수의 뉴스영화를 제작했으며 대부분 일본어를 사용했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법인 조영의 전신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반 완장’을 전시 중이다. 이 완장은 뉴스영화 촬영시 착용했던 것으로 이명우와 함께 대표적인 촬영기사로 활동했던 김학성이 사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