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형식과 내용에서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라는 수사가 어울리는 책이지만, 비교적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충격의 강약을 조절하는 치밀하고 계산적인 면도 엿보인다. 사람이 늙으면 모래로 풍화한다는 단편 <이윽고 광원이 없는 맑는 난반사의 표면에서……/TSUNAMI를 위한 32점의 그림 없는 삽화>는 각 페이지 하단에 별도의 시구가 따르는데, 해변을 묘사한 문장들은 모래알을 이야기하는 본편과 아스라한 연결점을 만든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2007년 “변화하는 시대에 소설만이 언제까지나 2세기 이전 스타일을 좇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보수적인 독자와의 작별을 고한 바 있다. 표기된 순서에 따라 책장을 뒤적여야 하는 <어머니와 아들>, 활자로 그림을 그린 <여자의 방>, 한줄 소설 <거울> 등은 그런 맥락에서 독선적이면서 자신만만하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은 <페캉에서>라는 사소설격 중편을 통해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히라노의 분신인 1인칭 화자 오노는 <페캉에서>라는 소설을 구상하러 처음 영감을 떠올렸던 페캉으로 떠난다. 로드무비의 분위기에 기묘한 겹구조를 가진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의 전작들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글쓰기와 창작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다. <페캉에서>를 읽은 독자라면 <당신이, 없었다, 당신>에서 만나는 불친절함에 대해 인내심을 갖게 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