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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최진실과 우리

최진실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 모두가 우왕좌왕이다. 도대체 왜? 만나는 사람마다 죽음의 이유를 추측하며 비현실적인 사건과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 하지만 가당치 않다. 어딘가 발을 헛디딘 사람처럼 휘청거릴 뿐이다. 인터넷의 연예 저널리즘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죽음에 합리적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핑계일 가능성이 크다.

<마요네즈> 개봉을 앞두고 최진실 인터뷰를 하고 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나이가 있는데 계속 귀여운 이미지만 내세우면 곤란하지 않느냐,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질문에 최진실이 많이 속상했다는 내용이었다. 퇴물 취급을 받은 것 같아 화가 났다는 말에 그 정도 질문은 괜찮지 않냐며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기자로선 당연한 질문을 했지만 개인적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다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런 질문을 했던 건 최진실이 애매해져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싶은 귀여운 여자 1순위에 꼽히던 최진실이 30대에도 같은 입지를 보장받을 것 같지 않았다. 해피엔딩의 주인공에 더없이 어울렸던 그녀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갈지 그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삶의 굴곡을 거쳐 최진실은 아줌마 연기로 다시 환영받았다. 영화를 찍진 않았지만 그녀의 활약은 TV에서 곁눈질로 봐도 빛이 났다. 화면에서 언제나 그러하듯 그녀가 결국 삶에서도 해피엔딩을 만들 것 같았다.

그러니까 최진실의 죽음이 던진 충격엔 이유가 있다. 그녀는 당대 한국에서 새로운 트렌드였던 로맨틱코미디의 대표주자였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질투>에서 시작해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최진실은 관객이 그녀의 행복을 응원하게끔 되어 있는 드라마로 인기를 얻었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그녀의 개인적 아픔조차 드라마에서 그러하듯 성공을 위한 시련처럼 보였다. 현실이 그걸 용납치 않는다는 걸 죽음으로 알려주기 전까지 말이다. 최진실의 죽음은 해피엔딩을 믿는 우리의 환영을 박살냈다. 그건 영화와 드라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90년대 초반 최고의 CF스타였던 그녀는 당시 중산층의 삶이 나아갈 등불 같았다. CF가 부자와 빈자의 경계를 지금처럼 확고히 나누기 전, 누구나 꿈꿔 볼 만한 밝은 미래가 최진실의 대표적 CF 이미지였다. 알콩달콩 사는 젊은 부부라는 그런 이상은 최진실을 끝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에서 “부자되세요”로 구호가 바뀐 시대. CF의 판타지를 통해서나마 계급과 세대의 장벽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사라진 시대. 그녀가 억척 아줌마로 돌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진실은 15년 전 그녀가 대변했던 중산층의 꿈이 부서진 그 자리에 돌아와 함께 삶의 피로를 나누는 이웃이 됐다. 그렇게 그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곁에 아주 가깝게 있었고 언제나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빈자리가 그래서 크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희로애락을 터놓고 나눴던 동시대의 다른 스타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녀가 없는 시대에도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고 그럴 수 없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더 무겁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P.S. 사진팀의 서지형 기자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 스틸을 찍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아쉽지만 사진작가로서 그가 걷게 될 새로운 길을 응원한다. 지난호에 공고가 나간 대로 사진, 취재, 편집기자 모집에 많은 지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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