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잡지 만드는 일을 시작했을 때 글을 쓰면 잡지는 저절로 나오는 줄 알았다. 글을 쓰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기에 그 글이 어떤 공정을 거쳐 어떻게 인쇄돼야 독자의 손에 가게 되는지에 관해선 사실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글쓰는 일이 잡지를 만드는 데 있어 무척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 무척 영세한 잡지였기에 글을 쓰는 며칠보다 훨씬 많은 일이 글을 쓴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찾거나 교열·교정을 하는 일은 물론이고 인쇄소에 가서 인쇄된 책을 규격에 맞게 자르고 포장한 뒤 트럭에 싣고 배달하는 일까지. 잡지가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노동이 들어가야 하는지 몸으로 배운 시기였다. 그렇게 일을 배워서인지 후배들한테도 인쇄소에 한번 가보길 권하는 편이다. 책상에 앉아 자판만 두드려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그곳에 있고 나의 고뇌만큼 가치있는 땀이 거기 흐르기 때문이다. 인쇄된 종이만 보고 종이의 재질이 어떠하며 무게가 얼마이며 어디서 수입했는지까지 아는 전문가 혹은 색상의 차이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몇번 기계의 잉크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눈치채는 인쇄기술자가 없다면 잡지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잡지가 그러한 것처럼 영화도 굉장히 많은 사람의 노동을 요구한다. 얼핏 감독은 그 모든 공정을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편집장이 디자인이나 사진 혹은 인쇄에 대해 모르는 것만큼 감독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취사선택하는 정도일 때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전체의 지휘자에 해당하는 감독이 이러할진대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 심하다. 편집기사의 전문 지식과 조명기사의 전문 지식이 겹치는 부분은 그렇지 않는 부분보다 적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영화인들조차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직책 가운데 모르는 영역이 많다. 디지털 기술과 촬영 기법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요즈음에 더욱더.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모든 직책을 망라하는 기사를 준비한 것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전체 공정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몰랐던 곳에서 우리가 몰랐던 사람들이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 자체의 의미를 달리 생각해볼 가능성도 제공한다. 감독의 예술 이전에 노동의 총체로서 영화. 그걸 염두에 두면 한국영화의 위기가 한국경제의 청년실업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제작편수가 줄고 제작비 규모가 줄어드는 상황은 일자리가 없어지고 기술 분야가 침체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면 창의력과 열정이 넘치는 전문 인력이 영화계에 많다는 것은 희망의 불씨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도 괜찮은 영화를 만드는 노하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에 가면 언제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일어서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듣는다. 영화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일 텐데 지키기 쉽지 않은 일이다.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의 명단을 계속 보고 있는 게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 기사를 통해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숙지하고 엔딩 크레딧을 한번 확인해보시라. 형식적 예의가 아니라 진짜 재미가 있어서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