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차도, 발전차도, 웅성거리는 스탭도 보이지 않는다. 8월29일. 제주도 한림읍 귀덕리에 자리잡은 강요배 화백 작업실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도록 평온하다. 평상에 모여 홍상수 감독이 난산 중인 오늘치 대본을 기다리고 있는 열서너명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스탭 전부다. 고사에는 출연배우 매니저들이 스탭보다 머릿수가 많았다는 말이 그럴듯하다. 홍상수 작품 번호 9번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제)에 너나없이 노 개런티로 합류한 배우는 김태우, 엄지원, 고현정을 비롯해 유준상, 공형진, 문창길, 하정우, 정유미 등 호명하기가 숨차다. 인물도 많고 대사도 많다. 줄곧 관객을 이끄는 영화의 구심점은 김태우가 분하는 영화감독 구경남. 하지만 그 또한 명실상부 구경하는 남자다. 구경남은 어떤 식으로든 ‘새 삶’을 시작한 과거의 지인들을 순방한다. 제천에서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연희(엄지원)를 만난 경남은 제주도로 와 선배 양천수 화백(문창길)과 그의 젊은 아내 고순이(고현정)와 조우한다. 다른 장소, 두 여인이라니 <생활의 발견>이 떠오르는데, 김태우와 고현정은 고개를 젓는다. 이번에는 유난히도 구조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겉이 푹신한데 속은 단단한 물체 같다고. 두 번째 촬영지는 해안도로 횟집. 현장 통제가 필요한 야외장면이 닥치니 비로소 단출한 스탭의 수가 아쉬워진다. 구경남과 양 화백, 고순이, 셋이서 막걸리를 먹는다. 선배 부부가 잘사는 이야기를 듣던 구경남, 뜬금없이 묻는다.“그럼, 선배님 섹스는 어떻게 되시나요, 요새?” 당황한 노년의 남자가 더듬는다. “음, 섹스는, 잘 안 된다고 봐야지.” 홍상수 감독은 3인숏에서 2인숏, 원숏으로 오가는 시점을 김훈광 촬영감독(<밤과 낮>)에게 정확히 주문한다. 현장의 홍상수는 정중하고 가차없다. 원하는 바가 구체적이고 결단은 신속 단호하다. 이 영화의 조감도를 보고 있는 것은 햇빛에 부신 듯 가늘게 뜬 저 눈뿐이다(<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9월 초 29회차로 촬영을 마감하고 편집을 마친 상태다. 2009년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