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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2008] 북중미영화: 인디 정신은 살아 있다
이주현 2008-09-30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최근의 북중미 영화들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 듯 보인다.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극영화들은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추구하는 대신 탄탄한 이야기로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특히 공포나 액션 등 장르영화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드라마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 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한다.

한뼘씩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일기

<엄마는 미용실에 계세요> Mommy Is at the Hairdresser’s 레아 폴/캐나다/2008년/99분/컬러/ 월드시네마

제목만 보고 영화의 배경이 미용실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캐나다의 대표적 여성 감독 레아 폴의 <엄마는 미용실에 계세요>는 1960년대 캐나다 퀘벡의 조용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스위스가 고향인 감독은 꾸미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영화에 담아내고 그 속에서 힘겨운 여름의 한때를 보내는 엘리스와 그녀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엘리스와 두명의 남동생 코코, 브누아는 각자의 취미생활을 즐기며 여름방학의 자유를 만끽한다. 엘리스는 낚시를 하고, 브누아는 그런 엘리스를 따라다니고, 코코는 미니 자동차(카트)를 만든다. 그러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일상은 엄마와 아빠의 불화로 엄마가 런던으로 떠나면서 깨진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지만 아이들은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다시 낚시를 하고 카트를 만든다. 동네 아이들과 무리지어 다니며 이웃집 아주머니 집 옷장에 몰래 숨어들어가 그녀와 이웃집 아저씨와의 섹스를 훔쳐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다만 막내 브누아에게 엄마의 가출은 큰 상처가 된다. 가지고 놀던 인형을 집어던지고, 벽장에 숨어 지내고, 코코가 만든 카트에 불을 지른다. <엄마는 미용실에 계세요>는 누구나 한 가지쯤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는 달콤 쌉싸름한 성장기의 비밀 한 토막을 담담하게 꺼내 보여주는 영화다. 소년 소녀들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영화도 끝날 때쯤이면 먹먹해진 가슴을 쓰다듬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 끝에서 만난 코끝 찡한 희망

<프로즌 리버> Frozen River 코트니 헌트/ 미국/ 2008년/ 97분/ 컬러/ 월드시네마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프로즌 리버>는 감독 코트니 헌트의 장편 데뷔작이다. 첫 장편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레이는 두 아들의 엄마이자 가장이다. 남편은 집을 나갔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던 차에 자신의 차를 훔친 릴라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불법이민자들을 밀입국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차가 필요한 릴라와 그저 돈이 필요한 레이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동업자가 되고, 얼어붙은 세인트 로렌스 강을 건넌다. 그러나 마지막이라 생각한 밀입국에서 둘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결국 국경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건너선 안 되는 강이었고, 넘어선 안 되는 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돈을 벌어야 했고 가정을 꾸려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가 가혹할지라도 말이다. 영화에서 압도적인 부분은 역시나 눈 덮인 모호크(Mohawk) 마을과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미국 뉴욕주 사이에 흐르는 세인트 로렌스 강의 광활한 풍경이다. 차가운 공기가 화면 밖까지 전해질 듯하다. 코언 형제의 영화 <파고>에서의 설원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몇몇 배우들은 얼굴이 낯익다.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는 <21그램>에, 레이에게 총을 겨누는 악덕 밀입국 중개인 역의 마크 분 주니어는 <배트맨 비긴즈>와 <메멘토>에 출연했다.

동영상 세대를 위한, 동영상 세대에 의한

<애프터스쿨> Afterschool 안토니오 캄포스/ 미국/ 2007년/ 122분/ 컬러/ 플래시 포워드

사립학교의 모범생 로버트는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자신의 혈기왕성한 기운을 써버린다. 포르노를 비롯해 인터넷을 떠도는 각종 동영상 모음을 보는 것이 그의 취미다. 로버트는 실제로 동영상을 찍기도 한다. 그러다 우연히 앤과 메리, 두 친구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게 된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두 친구의 죽음은 로버트를 잠시 충격에 빠뜨리지만 호들갑스러운 것은 오히려 선생님과 학교다. 앤과 메리를 기억하고 학생들의 충격을 치유하기 위해 ‘메모리얼 비디오’가 만들어지고 로버트는 영상 제작을 맡게 된다. 학생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부모를 인터뷰한다. 그러나 로버트는 일반적인 메모리얼 비디오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슬픔을 강요하는 음악과 흐느낌 가득한 인터뷰 멘트를 배제한 채 영상을 만든다. <애프터스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교라는 공간만을 담는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고, 특별한 시청각적 효과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어색한 화면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방법으로 찍어서 특별하게 느껴진다. 122분의 러닝타임이 힘들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분명 ‘동영상 세대’의 현재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찍고 찍히는 것에 대한 강박들을 말이다.

오아시스에 대한 믿음, 오아시스에 대한 환상

<내 안의 사막> The Desert Within 로드리고 플라/ 멕시코/ 2008년/ 112분/ 컬러/ 월드시네마

종교 박해가 이루어지던 1920년대 멕시코의 산 이시드로 마을. 엘리아스는 아들 아우렐리아노를 잃는다. 아내 역시 박해를 피해 도망치던 중 아이를 낳다 죽고, 아우렐리아노는 그 아이에게 다시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붙인다. 고향을 떠난 엘리아스는 자신이 큰 죄를 지어 고향 마을이 죽음의 불길에 휩싸이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속죄의 마음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속죄에 집착할수록 가족들은 더욱 고통을 받고, 교회가 완성됐지만 신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편 몸이 약한 아우렐리아노는 엘리아스의 보호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집 안에만 갇혀 지낸다. 그리고 종교 박해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 종교에 집착해 미쳐가는 아버지의 모습, 이승에서의 마지막 가족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린다. 그가 그린 그림은 현실로 변하고 현실은 곧 그림이 된다. 현실과 판타지, 실재와 가상,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겹쳐 보이는 장면들은 때론 아름답고 때론 슬프다. <내 안의 사막>은 신앙과 광신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흡인력있게 파고드는 영화다. 긴 역사와 가족사를 그리면서도 마지막 장면까지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2008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