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이 좋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누도 잇신 등을 비롯한 친숙한 감독들의 영화가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족, 죽음, 출산 등의 소재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태도가 흥미롭다. 놀랍기보다는 수긍할 수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삶의 기운을 찾아가는 불안한 가족의 1박2일
걸어도 걸어도 Still Walking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일본 | 2008년 | 114분 | 컬러 | 아시아영화의 창
온 가족이 모였다. 이 자리가 따뜻한 화합이 아닌 팽팽한 긴장의 공간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무렇지 않게 터져나와 부모, 형제의 가슴에 꽂히게 마련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이 불안한 모임의 1박2일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이날은 이 집 장남의 제삿날이고, 그의 죽음은 이 가족에게 공공연한 금기다. 뭔 일이 나도 날 판국. 영화는 엄마와 딸의 수다로 시작한다. 남편과 이웃 등을 소재로 한 이들의 방담은 여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전직의사인 아버지가 여전히 가장의 권위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그런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오후가 되어 아들과 딸 내외, 그들의 아이들이 고향집에 모두 모인다. 영화는 간만에 모인 이들이 함께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풍경, 아이들끼리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 등을 아무런 감정의 기복없이 담아낸다. 하지만 TV에서 흘러나온 사고뉴스의 한 토막과 매년 이맘때면 찾아와 음식을 먹고 가는 한 남자의 방문 등이 이들을 멈칫하게 만든다. 그 순간 이들은 장남의 죽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다음날이면 가족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떠날 것이고, 그들을 보낸 노부부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한 가족이 모여 식사에 열중하는 풍경은 분명 오즈 야스지로의 것이다. 현업에서 은퇴한 뒤 산책으로 소일거리를 하는 아버지는 아내와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가족은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지만, 풍요로운 만찬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갈등이 꿈틀거린다. 여기에 영화의 계절이 ‘늦봄’이라는 것까지 갖다붙인다면 무리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때 오즈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지만, <걸어도 걸어도>에서만큼은 그의 흔적을 숨기지 않은 듯 보인다.하지만 이러한 풍경들이 고레에다의 것이라는 점도 부정하기는 힘들다. 남편의 자살을 떠올리는 여자(<환상의 빛>), 살아 있을 때 경험했던 가장 행복한 기억만 선택하려는 사람들(<원더풀 라이프>), 종교단체에 빠져 집단자살했던 가족을 기억하는 사람들(<디스턴스>)은 모두 ‘죽음’을 기억했고, 그 덕분에 새로운 성장을 맞이했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어떨까. 고레에다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는 표현이 <걸어도 걸어도>에도 드러난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이 엄마 옷의 냄새를 맡았던 것처럼, <원더풀 라이프>의 사람들이 주먹밥의 맛을 기억하던 것처럼, 이들은 엄마가 해준 별미요리인 옥수수 튀김을 먹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과 죽은 가족을 떠올린다. 맛과 냄새를 환기하며 보낸 1박2일이 지나자, 둘째아들과 엄마는 어린 시절 죽은 아들, 형과 함께 즐겼던 프로레슬링의 선수 이름을 기억해낸다. <걸어도 걸어도>는 죽음의 기억을 통해 삶의 기운을 찾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새로운 산책이다.
두 여공의 우정, 아픔 그리고 황량한 풍경
무방비 Naked of Defenses 이치이 마사히데 | 일본 | 2007년 | 88분 | 컬러 | 뉴커런츠
<무방비>는 일본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모습으로 시작한다. 시골마을 한가운데 우뚝 선 플라스틱 공장. 그 안에서는 거친 기계들이 바닥과 공중을 오가고 있다. <무방비>는 이곳에서 일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숙련공인 리츠코는 어느 날 신참동료인 치나츠를 맞이한다. 치나츠는 만삭에 가까운 임신부다. 리츠코는 그녀에게 꼼꼼히 일을 가르치며 우정을 나누지만, 곧 치나츠의 부른 배에서 교통사고로 뱃속의 아이를 잃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고 뒤, 남편과 함께 자지 않고 함께 먹지도 않으며 오로지 일만 하고 있는 리츠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공장의 기계에 비유한다. <무방비>는 모성의 비극이 다시 모성으로 극복되는 과정을 꾸밈없는 연출로 묘사한다. 치나츠의 행복한 표정을 질투한 리츠코는 급기야 그녀를 죽이고픈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치나츠의 배에서 양수가 터지는 걸 목격하자 유산 뒤 한번도 잡지 않았던 운전대를 잡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이미 많이 본 듯한 이야기임에도 <무방비>가 흥미로운 이유는 매우 현실적인 배우들의 외모와 그들의 표정,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황량한 풍경이다. 특히 떨어지는 폭우를 무작정 맞으며 함께 걷는 두 여자의 표정을 가감없이 잡아낸 짧은 순간이 강렬하다. 한국에 주로 수입되는 일본영화의 ‘깔끔을 떠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당신께
구구는 고양이다 Goo Goo the Cat 이누도 잇신 | 일본·한국 | 2008년 | 116분 | 컬러 | 아시아영화의 창
이누도 잇신의 신작인 <구구는 고양이다>는 그가 연출했던 <금발의 초원>의 원작자 만화가 오오시마 유미코의 에세이를 빌려온 영화다. 40대의 독신 만화가 아사코는 고양이 싸바를 15년 동안 키웠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아사코가 62페이지짜리 크리스마스 특별판 만화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 싸바는 ‘안녕’이란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으로 창작의 기운을 잃어버린 아사코는 실의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눈앞에 수컷 고양이가 한 마리가 나타나고 아사코는 그에게 ‘구구’란 이름을 붙여준다. 영화에서 구구는 아사코의 일상을 지켜보는 눈이자, 그녀의 척박한 삶을 대변하는 은유다. 구구의 소동을 계기로 만난 연하남 세이지는 달팽이 집 속에 갇혀 있던 아사코를 세상으로 이끈다. 그러자 아사코는 집에 가둬두고 키우던 구구의 새 삶을 위해 이노카시라 공원을 통하는 창문을 만들어준다. 언뜻 팬시적인 여성영화로 보이는 <구구는 고양이다>는 수많은 고양이 애호가들에게도 ‘완소’아이템이 될 만한 영화다. <동물의 왕국> 스타일로 담아낸 고양이의 표정이 사랑스러운 건 둘째다. 무엇보다 <구구는 고양이다>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영화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른들과 아이들은 왜 다른 곳을 볼까
아이가 아이를 낳다 Child by Children 고지 하기우다 | 일본 | 2008년 | 122분 | 컬러 | 아시아영화의 창
정말 아이가 아이를 낳는다. 혹시 <주노>에 대한 일본영화의 대답일까? 하지만 <아이가 아이를 낳다>는 ‘아이의 임신’을 놓고 부모와 아이가 일심동체를 이루는 이야기도 아니고, <제니, 주노>처럼 어른들의 반대 끝에 출산을 이루고 마는 성공담도 아니다. 13살의 하루나는 어느 날 학교에 새로 부임한 신입교사의 성교육을 듣고 자신의 임신을 깨닫는다. “선생님, 저 아이가 생겼어요.” 그러나 아이들한테 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지에 불탔던 선생님도 하루나의 임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하루나는 같은 반 친구들의 도움으로 뱃속의 아기를 키우고, 이들은 어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아이를 받아낸다. 영화의 진짜 시작은 이때부터다. 어른들의 설왕설래는 아이들의 진실에 조금도 접근하지 않는다. 아빠가 될 아이의 부모는 책임을 회피하려 들고, 학교는 체면 차리기에 급급하다. <아이가 아이를 낳다>는 아이의 출산이라는 과격한 소재보다도 이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나의 출산을 알게 된 어른들의 첫마디는 “정말 너희끼리 아이를 받았니?”란 질문이다. 누구나 아이였지만, 어른이 된 이들은 그 시절 자신이 꿈꾸고 이뤄냈던 세계를 잃어버린다. 아이와 어른의 세계를 병치시키고 그들 사이의 간극을 묘사하는 감독의 시선에는 아이들을 향한 경외심이 짙게 배어 있다.
시간을 달리는 남녀의 청춘로맨스
도쿄 걸 Tokyo Girl 고나카 가즈야 | 일본 | 2008년 | 98분 | 컬러 | 오픈 시네마
100년의 시간을 넘어 교신하는 두 남녀의 멜로드라마다. 한국에서는 <동감>과 <시월애>, 미국에서는 <프리퀀시>로 이미 보고 또 본 이야기다. 그럼에도 <도쿄 걸>을 추천작으로 꼽은 이유는 심각한 영화들이 난무하는 영화제에서 잠시 쉬어가보자는 뜻(은 사실 미약하고), 그리고 일본 미소녀 배우의 신성으로 떠오른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가호가 출연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 영화에서도 가호는 사춘기를 맞이한, 그러나 데이트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학생이다. 그녀는 어느 날 고층빌딩의 계단에서 지진을 맞은 바람에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지진으로 인해 열린 웜홀(worm hole)은 그녀의 휴대폰을 삼키고 100년 전의 도쿄에 뱉어놓는다. 휴대폰을 주운 남자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픈 작가지망생 도키지로다. 휘영청 밝은 달이 뜬 어느 날 밤, 통화를 하게 된 두 남녀는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가 하면, 100년의 시간을 두고 같은 공간을 누비며 데이트를 즐긴다. 로맨틱코미디의 익숙한 모습들을 조합한 영화지만, 청춘남녀의 교감은 역시나 귀엽기 짝이 없다. <울트라맨> 시리즈 등을 연출했던 고나카 가즈야 감독은 요즘 남자 같지 않은 도키지로의 정중한 예절과 그가 시를 적어 보낸 거울에 감동하는 가호의 표정을 사랑스럽게 포착해냈다. 100년 전으로 날아간 휴대폰 배터리의 성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