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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미지를 향한 여행

추석 합본호를 만들고 1주일 쉬는 기간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앙코르와트를 보러갔고 기대했던 대로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유적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화양연화>의 엔딩이 왜 이곳에서 이뤄졌는지 한번 가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800년 전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석조건물이 허물어지는 틈 사이로 500년쯤 된 나무의 거대한 뿌리가 비집고 들어간 모습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시간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히리다. 이곳은 정말 시간을 묻고 고개 숙여 경건한 기도를 드리기에 더없이 적당한 장소처럼 보인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화양연화>를 보고나서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다. 막 서울의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자마자 더 덥고 습한 곳으로 간다는 게 어딘지 손해보는 느낌이었고 몇 차례 동남아를 다녀온 기억이 좋지만은 않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우쭐대는 부자 나라 여행객의 추태를 본 적 있는데다 가는 곳마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손을 내밀면 난감해져서다. 부자 나라를 구경하는 가난한 여행객의 약간 주눅든 자세가 내 체질엔 더 맞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앙코르와트 여행의 관문인 시엠립 공항에 내린 시각은 밤 10시가 넘어서다. 오토바이 뒤에 좌석을 붙인 ‘뚝뚝’을 타고 호텔로 가면 된다고 들었던 터라 내리자마자 공항에 대기 중인 뚝뚝 기사들과 흥정을 했다. 호텔까지 5달러를 달라는 기사의 말을 듣고 먼저 뚝뚝을 탄 다른 한국인에 물어보니 자신은 2달러에 가기로 했다고 한다. 당연히 나도 2달러로 깎으려고 승강이를 벌였다. 한참 그러고 있다 보니 그많던 뚝뚝이 썰물처럼 공항을 빠져나가 나와 흥정 중인 뚝뚝 기사만이 남았다. 기사는 고집을 굽히지 않다가 주위에 다른 뚝뚝이 하나도 없자 갑자기 이젠 10달러는 줘야 간다고 큰소리를 쳤다. 밤 11시를 넘어 인적이 끊긴 낯선 공항에서 3달러 깎으려다 5달러 더 내게 생긴 것이다. 흥정을 중단하고 구석에 쭈그려앉아 어떻게 할까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새로운 뚝뚝 기사가 다가와 5달러에 가자고 제안했다. 냉큼 가방을 들고 따라갔고 먼저 흥정하던 기사가 새로 나타난 훼방꾼에게 뭐라고 따지기 시작했다. 그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10달러를 벌 수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손님을 가로채 화가 났으리라. 나는 순간 화가 난 기사가 칼을 꺼내드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웬걸 바가지 요금을 씌우려는 쪽이나 그걸 방해한 쪽이나 한결같이 순박하게 생긴 두 캄보디아인은 몇 마디를 나눈 뒤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표정으로 사이좋게 헤어졌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동거하는 이 나라의 덜 진보된 시스템이 불만스럽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이런 첫인상과 함께 가슴에 남은 것은 어느 날 뚝뚝의 타이어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들른 캄보디아 민가의 아이들 모습이다. 70년대 초등학생 시절 봤던 코흘리개 어린이가 생김새가 다른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자기 모습에 신기해했다. 관광코스로만 다니면 볼 수 없던 캄보디아의 진짜 얼굴은 이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땅을 여행하다보면 편견과 선입견을 확인하거나 깨트리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캄보디아의 몇 가지 모습은 편견과 선입견을 깨트리는 쪽에서 신선했다. 한달쯤 전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유라시아영화제에 <씨네21> 기자를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을 때 기자들 사이에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뉴욕이나 칸에 가는 것과는 성격이 다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재혁 기자가 그곳에 다녀왔고 이번호에 그 기사를 실었다. 우리가 몰랐던 나라에서 그가 겪은 일들은 일독을 권하고픈 흥미로운 여행기다. 요즘 <씨네21>에선 카자흐스탄을 다녀온 정재혁 기자에게 ‘카레이 정’ 혹은 ‘굴나라 정’이라고 부르는 유행이 번지고 있다. 본인은 싫어하지만 ‘보랏 정’보다는 낫지 않나^.^

P.S. 약속한 대로 정훈이의 만화가 돌아왔다. 많이 환영해주시라.